보령의 흔적따라 188

제97편 ; 미산 강순(康純)장군의 묘

1. 들어가며 보령 출신의 영의정으로는 아계 이산해와 태초(太初) 강순을 손에 꼽을 수 있겠다. 아계 이산해의 묘소는 예산에 있으나 강순장군의 묘소는 보령의 미산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산해의 묘와 강순의 묘를 한번 답사하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봄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농막일을 포기하고 우선 강순의 묘를 답사하려 핸들을 잡았다. 도화담 삼거리에서 주산쪽으로 보령호를 좌측으로 끼고 활짝 핀 벚나무꽃의 호위를 받으며 보령댐 애향박물관을 지나 자라실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받고, 봉성보건소 삼거리에서 또 좌회전을 받아 1km정도 달리니 목적지가 보인다. 길 옆 전봇대에 '영의정 강순장군묘' 길안내판이 걸려있다. 차를 주차시키고 산자락의 사당을 둘러보고 네비를 켜서 '영의정강순의 묘'를 도보로 위치..

제93편; 성주 고운 최치원선생 신도비

1. 들어가며 남북국시대인 통일신라 말기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최치원 선생은 본국에 돌아와 당의 선진문명을 이땅에 펼치고져 하였으나, 6두품이라는 출생적 신분에 가로막혀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전국을 돌며 유람을 하다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성주사지의 낭혜화상비와 관련이 있다. 신라 선종의 최대사찰인 성주사의 주지스님이었던 무염대사가 88세에 열반을 하자 그의 제자들이 왕에게 비문을 요청하자 왕은 최치원선생에게 그임무를 수행하라는 명을 내리고, 최치원선생은 몇번의 사양끝에 임무를 맏았다고 한다. 그가 성주사에 머물면서 무염대사의 비문을 작성하면서 서해 절경인 이곳을 찾아 머리를 식히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제18편 ; 육지로 변한 보리섬- 최치원선생 유적지 참..

제92편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이름없는 영웅(印潑)

1. 들어가며 임진왜란은 도요도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1593년에 조선으로 침략한 전쟁이다. 왜가 파죽지세로 문경을 지나 충주에서 조선군을 격멸하고 한양으로 치달아 올라와 조정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임란 초기에는 왜군의 주력부대가 한양 입성을 주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다행이도 전라도의 곡창지대는 안전할 수 있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의 막강한 수군을 피하려는 왜군의 전략적 꼼수도 작용하였다. 임란이 장기화 되면서 군량미의 확보가 절실했던 왜군은 곡창지대로의 관문인 진주성을 함락하려고 큰 공을 들이는데, 이 때에 충청지역과 전라도 지역의 민초들이 거병을 하여 진주성을 지키려고 의병을 일으켜 지원을 하게 된다. 보령지역의 출신이면서 조선시대 양대 침탈전쟁인 임진왜란과 병자..

제91편 ; 청소 김좌진장군 묘(金佐鎭將軍 墓)

1. 들어가며 홍성에서는 그 지역 출신 역사인물로 최영장군, 김좌진장군, 성삼문 선생, 한성준선생, 한용운 선사를 꼽는다. 이 중에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는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 17-4로 근래에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는데, 장군의 묘는 후에 보령의 청소면 재정리 선산으로 후손들에 의해 옮겨져 이장되었다. 몇 해전 홍성군에서 김좌진 장군을 홍성의 인물로 추대하여 의식행사를 치르면서 제향의식까지도 함께 주최하고자 보령시에 협의를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묘소의 위치가 보령에 있기 때문에 제향만은 매년 보령에서 주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령시는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의원이 이곳에 함께 묻히고자 하였다는데 그 뜻도 이루지 못했는지 웃 선대의 묘소만 장군의 묘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