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95편 ; 오천 유격장군 계공(季公) 청덕비

푸른나귀 2020. 4. 8. 17:50


1. 들어가며


 오천의 충청수영성을 답사하다 보면 발길이 닿지 않아 놓치기 쉬운 문화재가 하나 있다.

 예전 수영성에 군용선을 정박하던 뱃터는 매립이 되어 수산시장과 항구, 주차장으로 변하여 있고,  관아가 있었던 터는 오천면사무소와 오천초등학교가 들어서 산천이 변하여 있다.  

 현재의 충청수영성은 원형이 많이 파괴되고 변형이 되어 있지만, 1510년 이장생(李長生, 1467~1522)에 의해 수군진성을 쌓을 당시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2009년 사적 제501호로 지정이 되면서 지역 사학관련 학계의 연구가 점차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어 충청수영성의 명성을 높이고 있다..(제47편 ; 보령의자랑 충청수영성 참조) 여기서는 충청수영성의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계금 장군의 청덕비에 대하여 논하기로 한다.


 수영성의 진휼청에서 언덕을 내려가며 오천초교 쪽으로 방향을 잡아들어 교사동 후편으로 가면, 언덕받이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게되는 비와는 다른 형태의 비석을 보게 된다.

 즉, 오천초등학교 정문으로 들어서서 교사동 후편의 둔덕으로 올라가면 청덕비를 만날 수 있다.

 보령지역의 비석은 주로 남포오석으로 검은색을 띠는 몸체를 가지는데 비해 이 비석의 몸체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대체적으로 회색빛을 띠게 된다. 대리석은 빗물에 취약하여 외부에 세우는 비석의 몸체로 적당하지 않은데, 어떻게 대리석비를 쓰게 되었는지 연유가 궁금하다.

 이수(비석의 머릿돌)의 형태도 반원형으로 전면 7개, 측면 2개의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이는 보령지역의 이수에 용트림을 조각하는 수법과 판이하게 다르다. 이는 혹시 명나라의 풍을 답습한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비문은 전면에 유격장군의 청덕비명과 전투에 참여 했던 장수들의 이름이 하부에 기록되어 있고, 후편에는 유격장군을 칭송하는 금석문이 적혀있다.

 원래 이 비석은 영관사(營官舍) 남쪽에 있었는데, 1689년 관덕루 아래로 옮겨지고 비각도 세웠다고 한다.

 그후 다시 운주헌 뒤로 옮겨지게 되는데, 그 곳이 지금의 오천초등학교 뒷편 현재의 자리이다.

 비각은 사라지고, 비각을 세우는데 기초로 쓰였던 장초석(長礎石)이 비 주변에 남아있다.


 임진왜란의 후반부인 1598년 4월에 명나라 수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지원군의 장군에게 전쟁에 필요한 많은 물자와 인력동원 등을 충청수영성이 조달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서 명나라 장수가 왜군을 섬멸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준데 고마움을 표하느라 성내 주민들이 청덕비를 세우는데에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백성들의 피와 땀이었을 것이다.

  왜적들이 물러나고, 원정을 왔던 명나라는 얼마 뒤에 임란 참여의 여파로 국력이 쇠하여 북방 여진족에 의해 새로 세워진 청나라에게 멸망을 당하게 된다.

 조선은 저물어가는 명과의 의리를 명분론으로, 신흥국으로 세를 키워가는 청나라를 배격하다가 병자호란으로 한바탕 큰 회오리바람  속으로 백성들을 떠다미는 우를 범하게 된다.


400년 넘는 세월을 훌쩍 지난 근래에 절강성에 사는 계금장군의 후손과 비문을 지은 안대진(安大進)의 후손들이 유격장군 계공 청덕비 앞에서 함께 악수를 나누며 교류를 가졌다고 한다.



2. 유격장군 계공 청덕비 (遊擊將軍季公淸德碑)


    * 위치 ;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661-9 (오천초교 교사동 후편)

    * 지정 ; 충남 유형문화재 제159호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했던 명나라 수군 장수 계금(季金)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으로 전쟁 중이던   1598년 4월에 세워졌다. 유격장군(遊擊將軍) 계금은 명나라 절강성(浙江省) 출신의 수군장(水軍將)으로 왜란 당시 3천 명의 수군을 이끌고 이곳에 상륙한 뒤 전라도로 이동하여 왜군을 토벌하였다. 비문은 당시 승문원 교리 안대진(安大進)이 지었으며 장군의 덕(德)을 칭송하고 왜적을 빨리 무찌르기를 기원하였으며, 장군의 위엄을 빌어 바다에서의 안녕을 기도하자는 내용이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수군이 충청수영에 상륙하였음을 알려주고, 당시의 민속(民俗)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현장 안내판 발췌)


이 비석은 조선시대인 1598년(선조 31) 4월에 세워졌다. 비신(碑身)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 104㎝이다. 비석의 머릿돌인 이수는 반원형으로 되어 있고, 지붕받침은 생략되어 있으며 조각도 용트림 대신 구름무늬를 넣었다. 구름무늬는 앞면에 7개, 옆면에 2개가 새겨져 있다. 제액(題額)은 반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으나 글씨가 없다.  비문(碑文)은 앞면과 뒷면에 씌어 있다. 앞면에는 비명(碑名)과 주요 참모들의 성명이 있고 뒷면에는 많은 내용이 적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중국 명(明)나라 수군(水軍) 3,000여 명이 오천을 통하여 들어왔다는 사실과 장수인 유격장군을 숭배하여 바다에서의 안녕과 집안의 복을 빌자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보령시청 홈페이지 참조)


 



   @ 2018년 08월 08일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