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성주산 산림의 주 수종으로는 오래 된 소나무 군락이 전부터 형성되어 왔었다.
하지만 지구환경의 변화로 굴참나무와 같은 활엽수가 침엽수인 소나무를 밀어내고 있으며, 몇 해 전부터는 재선충에 의한 괴사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차별적으로 베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소나무가 베어진 공간에는 병충해에 강한 편백나무로 식종을 개선하고 있는데 앞으로 언젠가는 성주산에서 소나무를 볼 수 없는 시기가 도래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유년시절에 산다람쥐처럼 뛰어 놀았던 성주산 자락의 소나무들은 내가 살아가면서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마음 속에 항상 있었는데, 그 중의 한 편린은 송진을 뱉어내는 V자형 톱질자욱 밑으로 달려있던 검은 깡통들이 기억된다.
지난 겨울 지역 도서관에서 읽었던 자료 중에 '성주산 송진채취 소나무의 사실규명과 분석 (김*래, 2017, 보령문화)'를 읽으면서 내가 듣고 보았던 생각과 다른 주장을 하여 성주산 소나무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였다.
작자에 의하면 화장골 입구의 송진채취 흔적을 가진 소나무의 안내판에 소개 된 '고통 받는 소나무'처럼 일제에 의한 피해인지를 실사를 통해 확인 하였다고 한다.
실사를 하는 방법으로는 성주산의 화장골을 중심으로 한 각 지역의 소나무 군락지의 송진채취 표본목을 설정하여 흉고와 채취부위의 지표면에서 높이, 채취부분의 몸통둘레, 그리고 코어드릴을 사용한 나이테 분석 등으로 약 10여개소를 실험군으로 하여 표준이 되는 수치를 산정 하였다.
그 결과 송진 채취 부분의 높이는 지표면에서 80~150cm 높이에 위치하고, 나무의 둘레 또한 80~120cm 이며, 나무의 수령 또한 80~120년 정도의 수령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코어드릴로 채취한 나이테의 밀도로 볼적에 60년대에 형성 된 부분이 소나무의 표피를 벗겨낸 사유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여 나이테 간격이 좁았음을 확인하였고, 소나무의 수령으로 보아서도 일제시대의 수탈 흔적으로 보기엔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임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내 좁은 소견으로, 60년대 후반 성주산을 뛰어 놀았던 저편 기억으로 아름드리 소나무 마다 V자형 톱자욱에 매달린 송진 채취 깡통이 있었음이 상기되니 그 시대에도 송진 채취가 이루어졌음을 인정할 수 있다.
허나, 성주산의 소나무 표본을 십 여개소 확인으로하여 이 모든 것이 일제 수탈의 증거가 아님을 말 하는 것도 과학이란 증거주의에 빠져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일제 강점기 말경(1940~1945) 일제는 대동아 전쟁으로 숫가락을 포함한 쇠붙이며, 관솔(소나무 옹이)과 송진이며, 갖가지 곡식들을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걷어들여 전쟁물자로 사용하였음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나이드신 어른들의 말에 송진채취 노동에 참여 했었다는 말도 익히 들었던 터이다.
60년대 우리의 손으로 송진채취를 하던 시기와 일제의 공출에 의한 송진 채취의 시기와 불과 2~30년의 시간적 간극이 있을 뿐인데, 보령지역의 소나무에 대해- 성주산 줄기를 따라 형성되는 지역적인 관계를 첨작하여 청양군 남양면과 부여군 외산면을 포함하여- 좀더 연구를 해 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성주산의 고통받는 소나무가 일제의 수탈행위가 아닌 60년대 빈곤했던 시절의 수출 명목에 의한 우리손으로의 파괴였다는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사실과 다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성주산 화장골을 가끔 산행을 하면서 찍어왔던 피해소나무를 이번에 등산로 주위에 산재한 많은 사진을 찍어 보았다. 몸에 배인 아품을 감내 하면서 오늘도 성주산 소나무는 늘 푸르게 하늘을 받치고 있다.
산림청에서 일제강점기 송진채취 피해 소나무를 「산림문화자산」으로 추진하기 위해 경북 문경, 충북 제천, 충남 보령, 충남 태안 및 서산, 경남 함양, 전북 남원, 경남 합천, 인천 강화 석모도 등 조사를 2017년부터 2년간 실시를 하여 피해소나무 분포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2. 고통 받는 소나무
* 위치 ;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산 39 번지~계곡 임도~성주산 전망대~ 능선 등산로~화장골 입구
V자로 깊게 패인 이 상처는 일제말기(1943~1945년)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 군수물자인 항공기 연로로 사용하기 위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국으로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상처에 의해 생장이 어려워 진 소나무는 이 나무처럼 꿋꿋하게, 자라기도 하지만 솔잎흑파리 등의 병충해에 약하여 쉽게 죽기도 한답니다. (성주산 화장골 휴양림 입구 소나무 해설 안내판)
@ 통나무 팬션 앞 진입로 입구 소나무
@ 만수산 전망대로 오르는 임도 주변의 소나무 ( 아래로 수순에 따라 촬영)
@ 만수산 정상 성주산 전망대
@ 전망대에서 능선 등산로로 내려오면서 촬영한 소나무 (아래 동일)
@ 화장골 매표소 옆 소나무 (아래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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