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홍성에서는 그 지역 출신 역사인물로 최영장군, 김좌진장군, 성삼문 선생, 한성준선생, 한용운 선사를 꼽는다.
이 중에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는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 17-4로 근래에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는데, 장군의 묘는 후에 보령의 청소면 재정리 선산으로 후손들에 의해 옮겨져 이장되었다.
몇 해전 홍성군에서 김좌진 장군을 홍성의 인물로 추대하여 의식행사를 치르면서 제향의식까지도 함께 주최하고자 보령시에 협의를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묘소의 위치가 보령에 있기 때문에 제향만은 매년 보령에서 주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령시는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의원이 이곳에 함께 묻히고자 하였다는데 그 뜻도 이루지 못했는지 웃 선대의 묘소만 장군의 묘 상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재정리 김좌진 묘역에 가까이에 광성부원군의 묘택과 사우가 근접해 있어서 김좌진 장군 또한 광산김씨의 종산에 해당하는 곳에 묘역을 조성한게 아닌가 하고 의구심이 들었었는데, 확인하여 보니 장군은 본관이 안동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항일운동의 혁혁한 공과가 있었음에도 암살을 당해야 했던 침통함이 현 시대의 정치사에도 육체적인 암살에 못지않는 정신적인 암살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닌지 비유가 된다.
때 마침 지나가는 장항선 상행열차의 기차바퀴 소리가 장군의 묘소를 향해 고개를 숙인 노송의 솔잎 사이로 메아리가 되어 스쳐 지나가는 듯하며, 객실 안의 승객들이 기찻길 바로 옆(원죽역~청소역 사이)으로 위대한 독립투사의 안식처를 스쳐지나감을 알고 있으려나하는 의구심이 든다.
2. 김좌진 장군 묘소
* 지정 ; 기념물 제73호 (1989.12.29)
* 위치 ;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 50
김좌진(1889~1930)장군의 무덤은 원래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된 것을 1957년에 장군의 선산으로 옮긴 것이다. 장군의 호(號)는 백야(白冶)이며,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 506번길(행산리)에서 태어났다.
18세에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새로운 학문을 교육하였고,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3년간 옥고를 겪었다.
1919년 3.1 독립운동 후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으로, 1920년 10월 일본군을 맞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3,000여 명의 일본군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5년 김혁(金赫)과 신민부(新民部)를 조직하고 주석(主席)에 취임하여 재 만주 동포의 교육과 민생문제에 주력하였다.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함께 연합전선을 결성하고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준비하던 중 1930년 1월 공산당 청년 당원에게 암살 당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3. 참고자료
1) 김좌진의 무덤이 이곳으로 옮기게 된 사유는 김장군이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을 위해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자산을 군자금으로 전용하여 고향에 있었던 터전이 남아 있질 않아 외가쪽 한산이씨의 산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김장군의 비문은 팔봉 김기진의 글인데 김기진은 일제강점기 KAPF의 일원으로 작품활동하다가 일제의 회유와 강압으로 일제말기 변절하여,일제를 위한 문학활동을 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독립투사의 비문에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2020.10.29)
2) 1년만(2021.11.06)에 다시 들러보니 김좌진 장군 묘 안내판 옆에, 비문에 대한 논란을 의식한 지자체에서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자 안내판을 세워 놓았음을 보게 되었다. 다소 늦은감은 있지만 옳바른 역사인식을 위해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여기에 묘비석 안내문의 내용을 옮겨 기록한다.
@ 김좌진장군묘 묘지석
백야 김좌진 장군의 묘역 내에 있는 국문 묘비는 1971년 제작되었다. 글씨는 일중 김충현이 썼으며, 글은 팔봉 김기진이 작성하였다.
일중 김충현(金忠顯,1921~2006)은 서예가로 오산 학교 이사장 등을 통해 후진 양성에 힘쓴 인물로, "윤봉길 열사 기의비", "백범 김구선생 묘비", "사육신 묘비"등을 남긴 명필이었다.
팔봉 김기진(金其鎭,1903~1985)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명단에 포함되었다.
팔봉 김기진은 문인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프로문학의 이론을 내세우고 ' 조선프로레탈리아 예술가동맹(KAPF)'의 실직적인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44년 대동아문학자 대회에서 조선 대표로 참석하는 등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행적을 보였다. 이에 안동김씨 문중에서 참회의 의미로 백야 김좌진 장군의 묘비문을 쓸 것을 권유하여 쓰게 되었다.
《 충청남도와 보령시에서는 문화재 내 묘비 작가의 친일행적과 관련하여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자 이 안내문을 작성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 묘 앞에서 바라본 장항선 상행열차
@ 장항선 철길에서 바라본 묘 전경
@ 김좌진 장군의 비문에 대한 해명자료 입간판(2021.11.06 촬영)
'보령의 흔적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93편; 성주 고운 최치원선생 신도비 (0) | 2020.04.03 |
---|---|
제92편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이름없는 영웅(印潑) (0) | 2020.03.26 |
제90편 ; 남곡동 꼬부랑 소나무 (0) | 2020.03.21 |
제89편 ; 주포 마강리 밀양박씨(密陽朴氏) 열녀비각 (0) | 2020.03.03 |
제88편 ; 장항선 마지막 간이역 청소역사 (0) | 2020.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