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92편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이름없는 영웅(印潑)

푸른나귀 2020. 3. 26. 16:47

 

1. 들어가며

 

 임진왜란은 도요도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1593년에 조선으로 침략한 전쟁이다. 왜가 파죽지세로 문경을 지나 충주에서 조선군을 격멸하고 한양으로 치달아 올라와 조정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임란 초기에는 왜군의 주력부대가 한양 입성을 주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다행이도 전라도의 곡창지대는 안전할 수 있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의 막강한 수군을 피하려는 왜군의  전략적 꼼수도 작용하였다.

 임란이 장기화 되면서 군량미의 확보가 절실했던 왜군은 곡창지대로의 관문인 진주성을 함락하려고 큰 공을 들이는데, 이 때에 충청지역과 전라도 지역의 민초들이 거병을 하여 진주성을 지키려고 의병을 일으켜 지원을 하게 된다.

 보령지역의 출신이면서 조선시대 양대 침탈전쟁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몸으로 부딪치며 살다가 한줌의 흙으로 고향땅에 묻힌 인물 인발(印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청소면 재정리의 김좌진장군 묘소에서 철길 건너편으로 한 200여 미터 떨어진 소나무 숲속에는 인발장군의 묘소가 있다. 작년 봄에 찾아갔을 때에는 잡초에 뒤덮혀 위대한 영웅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다고 느껴졌었는데, 이번 답사에서는 후손들에 의해 비석과 상석을 새로이 하고 둘레석과 주변을 잘 정비 한 상태를 보게 되었다.

 임란 발발후 호란까지의 시간이 43년이며, 보령땅에 살던 무장 정로위(定虜衛) 인발(印潑)이 67세에 수원 광교산 산자락에서 전사를 하였으니 임란 참여는 24세에 해당된다. 한 세대에 큰 전쟁을 두번이나 겪고 직접 참여했으니 그 시대의 백성들의 실상은 어루짐작할 수 있겠다.

  광교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라병사 김준룡은 경기도 시흥시 소래산 아래 장군의 신도비가 세워져 후손들과 후세에게 지속적인 추앙을 받고 있는데, 일생을 무장으로 살면서 전장을 누비다가 전사한 인발 장군에 대하여서는 추승이 이루어지지 않고 초야에 쓸쓸하게 묻혀 있는 점이 아쉽기도 하다.

 그의 후손인 교동 인씨(喬桐印氏)들은 선산을 둔 고향 땅을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으나, 그 와중에서도 묘역을 정화시키고 인발(印潑)의 업적을 이어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위치 ;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 55-1

 

 

2. 참고자료

 

  @ 보령 무장 인발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1593) 7월 16일자의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이 진주성의 함락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정로위(定虜衛 ; 고급장교) 인발의 말을 인용하였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진주성을 외부에서 지원하기 위해 고현(古縣)에서 진군을 하는데 척후장인 안인무,김억린 등이 보고 하기를 ' 발가벗은 남자가 수풀 사이에서 걸어나오기에 잡아서 물어 보았더니

「나는 본래 충청도 보령에 사는 정로위(定虜衛) 인발(印潑)이다.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6월23일 함안에서 진주로 옮겨 갔는데...(생략).. 우리의 제장으로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본주판관 성수경, 김해부사 이종인, 거제현령 김준민, 사천현감 장윤, 태안군수 윤구수, 결성현감 김응건, 당진현감 송제, 남포현감 이예수, 황간현감 박몽열, 보령현감 이의정, 본주목사 서예원 등이 성 안에 유진(留陣)하고 있었는데 이달 20일 오후에 왜적 200여 명이 동쪽 성 밑으로 진격해 왔다. 얼마후에 접전을 하였는데 여러명이 화살을 맞자 퇴각하였다...(생략).. 충청병사 황진도 28일 이마에 탄환을 맞고 죽었다. 29일 오후에 왜적들이 성 밑으로 가까이 와서 일시에 성을 함락하니, 성 안에서 혈전을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며, 성안의 장사와 남녀들의 생사는 분명 알수 없다. 나는 그때 신북문(新北門)을 지키고 있었는데 힘껏 싸웠으나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성 밖으로 뛰어내려 시체 속에 묻혀 있다가 밤을 틈타서 몰래 나와 산으로 올라가서 험한 길을 걸어가 순찰사(巡察使)에게 진주성이 함락 된 연고를 고하려는 참이었다. 」라고 했다' 며 고하였다...(생략)...

 임란이 발발한 이후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때에 왕실의 서얼출신 이몽학이 홍산의 무량사에서 모의를 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1596년 7월에 홍산현을 습격하고 임천군,대흥군을 함락하였다. 이 이몽학의 난을 토평(討平)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은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책록 되었는데, 1등에는 홍가신, 2등에는 박명현, 최호, 3등에는 신경행, 임득의 등이 책록 되었다.

 보령현감 황응성과 함께 이몽학의 난 토벌에 참여한 인발 장군은 청난원종공신 2등에 책록 되었으며, 그의 조카 인대충도 청난원종공신 2등에 함께 책록 되었다.(청난원종공신록, 선조38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전국에 근왕(勤王)을 명령하였다.

 전라감사 이시방은 1637년 1월 20일에 6,000명의 근왕병을 소집하고, 29일에는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진군을 개시하였다. 이 때에 화엄사의 스님 벽암, 각성도 각기 1,000여명씩 승병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전라병사 김준용은 남한산성 남쪽 100리 지점의 수원 광교산에 진출을 하여 장기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이 때 청군은 충청도 근왕병력을 격파한 양굴리(누루하치의 사위,청태종의 매부)는 2,000명으로 남한산성 길목을 차단하고, 5,000여명으로 전라도 근왕병력을 공격하였다. 김준용이 1선에 포수, 2~3선에 창검병을 두어 공격해 오는 청군을 크게 물리치고 청군의 대장 양굴리를 전사 시키는 큰 성과를 올렸는데 이 전투가 병자호란때 금화전투와 함께 2대 승첩으로 불리는 광교산 전투이다.

 불행하게도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면서 광교산에 근왕병으로 싸웠던 민초들은 흩어지게 되었고, 이 광교산 전투의 김준용 부대에 참전하였던 인발(印潑)은 열심히 싸우다 전사를 하여 훗날 광교산의 중이 인발의 호패를 보고 부고를 알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보령 고향에 안장 하였다. 

  (보령 무장 인발(武將 印潑, 1570~1637) 將軍, 황의천, 보령문화원 강좌 참조) 

 

 

 @ 진주성 전투와 광교산 전투

 

  1).진주성 전투

    1592년 4월 파죽지세로 조선반도를 유린하며 평양성 까지 올라왔던 왜군은 명나라와 연합한 관군과 의병들에게 밀려 1593년 초 서울에서 철수해 부산으로 집결했다. 5월 말경에는 거의 모든 병력이 후퇴해 부산으로 10만명 가량의 군사가 모여들었다. 일본의 도요토미는 진주성에서 패전한 것을 수치로 여겨 복수전을 지시했다고 한다. 1593년 3~4월에 거쳐 세 번이나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이는 진주성을 거점으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장악하여 명나라와 화의를 이루어 영구히 그들이 주둔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진주성에는 창의사(倡義使; 의병모집의 일을 맡은 특사) 김천일과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 호남 의병장 고종후와 임희진 등이 군사 3,500여 명을 거느리고 대비하고 있었다. 문관 출신 서예원을 제외하면 모두 의기가 하늘을 찔렀다. 주위의 주민들이 몰려들어와 성안에는 6만 여명 가량의 사람들로 북적댔다. 장수들은 밤낮으로 가리지 않고 무기와 양곡을 점검했다. 다행히 창고에는 10만 석의 곡식이 저장되어 있었다. 장수들은 상주에 주둔한 명군과 각지에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장수들은 성 남쪽의 촉석루 근처에는 남강이 가로막히고 절벽과 험한 바위로 둘러 있어 적이 쉽사리 진격 통로로 삼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성 서쪽과 북쪽에 해자를 파서 물을 끌어들여 늪을 만들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선봉대가 동쪽을 먼저 공격하리라 여겨 이쪽에 군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두 북문에는 김천일부대와 이종인부대, 서문에는 황진부대, 촉석루 남강 건너편에는 고성의 의병이 배치됐다.

 6월15일, 일본군이 김해와 창원을 거쳐 함안으로 밀려오자 함안에 주둔해 있던 권율, 이빈, 선거이 등이 거느린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다음 날 부산진과 김해에 정박해 있던 일본 전선 800여 척이 웅천, 제포, 안골포에 전진배치 되었고, 선봉선 몇 척이 영등포와 견내량 사이의 좁은 해협에 출몰했다. 이순신은 이 때의 정경을 두고 "온 바다를 가득 덮었다."고 표현했다. 이순신은 수군을 통영 앞 한산도에 배치하여 적군의 길목을 가로막고 결전에 대비했다. 권율은 남원으로 후퇴해 있던 중 정식으로 도원수 임명의 첩지를 받았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운봉에 주둔하여 다음의 사태에 대비했다.

 6월 19일, 일본군은 기세당당하게 진주성을 향해 전진했다. 진주성에서 척후병과 복병을 보내 잠시라도 지체 시키려 했으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일본군 제1대의 선봉은 기마병 200여 명이었다. 선봉은 예전과 달리 치밀하게 작전을 폈다. 이들은 개미떼처럼 몰려들었지만 행군 질서가 정연했다. 적군 1대는 북문, 2대는 서문, 3대는 동문을 향해 진격했다. 4대는 동쪽 길, 5대는 서쪽 길 외곽에 주둔했다.

 선발대가 성의 서북쪽으로 밀려와 늪의 물을 빼내고 흙으로 메운 뒤에 큰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확히 아군의 의표를 찌르는 작전이었다. 적군은 새로 닦은 길을 이용해 성벽 밑돌을 파내기 시작했다. 성벽을 허물려는 것이다. 아군은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날도 저물어 이날은 성벽을 허물지 못했다.

 적들은 파상공세를 펼치며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올랐다. 아군의 항전도 만만치 않아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렇게 밀고당기며 이틀을 보냈다.

 사흘째 되던 날, 적은 여러 종류의 신무기를 동원했다. 튼튼한 나무궤짝을 바퀴가 네 개 달린 수레 위에 얹어 놓고 궤짝 속에는 군사들이 들어앉아 손으로 수레를 앞으로 굴리고 후퇴를 할 때에는 밧줄을 뒤에서 당겨 후진시키는 무기가 처음 등장했는데 궤짝의 윗부분이 거북등 같다 하여 '귀갑거( 龜甲車)'라고 불렀다. 거북선의 모양을 수레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귀갑거는 돌진 하면서 총알과 화살을 막아내는 데 효과적으로 쓰였다.

 그 다음 날, 적군은 동문 밖에 흙산을 쌓고 그 위에 망루를 설치해 성안을 내려다보면서 공격을 했다. 황진이 이에 맞서 흙산을 만들려고 직접 돌과 흙을 나르며 동분서주를 하자 여러사람들이 나서서 순식간에 흙산을 만들어냈다. 흙산 위에 정(井)자 모양의 누대를 설치하고 황진이 올라가 총통으로 적의 망루를 파괴했다. 적군은 귀갑거를 타고 돌진해 성벽을 기어올랐으나 칼과 돌멩이 세례를 받고 물러났다. 적군은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다.

 닷새째 되던 날, 적군은 새로운 전술을 시도했다. 군사들이 큰 나무궤짝 위에 짐승의 가죽을 씌어 머리와 등에 지고 성벽 밑으로 육박해 돌격하는 전술이었다. 이 방법으로 성 밑까지 접근해 성벽을 파괴하려 들었다. 또 동문 밖에 큰 기둥 두 개를 세워 그 위에 판잣집을 올려놓고 그 안에서 불화살을 성 안으로 쏘았다. 그 불화살이 초가에 떨어져 화염이 자욱했다. 황진도 높이 판잣집을 만들고 대포를 날려 적의 판잣집을 무너트렸다. 성안 사람들이 물을 길어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려 불이 꺼졌다. 이날 거제현령 김준민이 무너진 성벽틈으로 뛰어드는 적을 막다가 죽었다. 아군 장수 가운데 최초의 희생자였다.

 엿새째 되던 날, 적군은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큰 흙산을 만들었다. 그 위에 대나무로 울타리를 만든 뒤 그 속에서 몸을 가리고 조총을 비오듯이 쏘아댔다. 이때 성안에 있던 사람 수백 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적군은 귀갑거를 이용해 성밑으로 접근하고 쇠망치로 성벽을 뚫었다. 아군이 섶에 기름을 묻힌 뒤 불을 붙여 귀갑거를 태우자 적이 퇴각했다. 이날 밤 적이 우키타 히데이의 명의로 항복 권유문을 보내왔다.

 "우리가 입성해 한꺼번에 도살하는 것은 참혹하다. 장수 한 명을 우리에게 넘겨주면 나머지 군사와 백성은 성안에서 편안히 살 수 있으리라. 항복하려면 모자를 벗어서 표시를 하라."

 " 우리는 죽고 말 것이다. 명군 30만이 추격해 너희를 모조리 죽일 것이다." 하지만 명군이고 아군이고 가릴 것 없이 개미 새끼 힌 마리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밤, 적이 마침내 서문쪽 성벽에 구멍을 뚫어 무너지려했다. 황진이 이것을 발견하고 다음날 아침 적이 이 구멍으로 몰려들 것으로 짐작하고 군사를 배치해 대기했다. 그가 생각한대로 적군이 몰려오자 일시에 공격을 퍼부어 수백명을 죽였다. 황진이 성밖을 내려다보며 널린 시체를 점검하는데 갑자기 성밑 시쳇더미 속에서 한 군졸이 조총을 쏘아 총알이 그의 이마에 맞았다. 용장 황진이를 잃은 성안 사람들은 사기가 꺽였다. 이날 황진이의 죽음을 조문하듯 장마비가 음산하게 내렸다.

 가토와 구로다는 새로운 꾀를 짜냈다. 귀갑거에 물기가 도는 쇠가죽을 씌워 화공에 대비한 다음 돌격대를 뽑아 동문 성밑으로 투입시켰다. 6월29일 한 낮 성벽의 기초석 몇개를 뽑아내자 성벽이 무너졌다. 적군 3명이 먼저 성가퀴에 올랐다. 뒤따라 군사들이 밀려들었다. 곧이어 북문과 서문쪽도 뚫렸다. 아군은 함성을 지르며 습격해오는 적을 피해 촉석루 쪽으로 밀려났다. 목사 서예원은 도망치고 나머지 장수들은 촉석루 밑 남강가의 바위에 모였다. 피에 젖은 전포를 입은 채 장수들은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무기를 강물에 던져 넣었다. 김천일, 최경희, 고종후, 양산숙 등이 차례차례 강물로 뛰어들었다. 김천일은 아들 김상건의 손을 잡고 뛰어 들었으며, 이종인은 적군과 격투하다가 양쪽 팔에 적군 하나씩 끼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열흘 동안의 치열한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진주산성 전투는 동래성 전투보다 더 참혹했으며, 행주산성 전투보다 더 처절한 항전의 전투였다. ( 한국사이야기11, 이이화, 한길사, 2015, 287~292쪽)

 

2). 광교산 전투(근왕병)

    1637년 설날, 청군은 탄천(炭川)에 군진을 펼쳤다. 청태종이 인조의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항복을 독촉하며 조선군을 계속 공격하고 있었다. 남한산성 내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 간에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상황에서 완전 항복을 위한 수순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죄를 짓고 스스로 전란의 꼬투리를 불러와 외로운 성안에 피신해 있지만 당장 위급한 형편입니다. 지난날의 일에 대해서는 작은 나라가 이미 그 죄를 알고 있습니다. 죄가 있으면 치고 죄를 뉘우치면 용서해 주는 것이 큰 나라가 하늘의 뜻을 체현해 만물을 포용하기 때문입니다.(「인조실록」 15년)

 이 글에서 황제라고 똑바로 썼으나 척화파의 반대에 부딪혀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 신(臣)이니 폐하(陛下)니 하는 용어도 쓰지 않았다. 사관은 "비굴한 말과 아첨하는 어구를 쓰지 않은 데가 없어서 보는 사람마다 분해 팔을 걷어붙이고 눈물을 흘렸다."고 썼지만 조정에서는 이때까지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요구는 완전 항복이었다. 용골대는 이 글을 받고 왕자들이 이곳으로 오면 상의해 알려주겠다고 통고하였다.

 이렇게 필설로 밀고당기는 사이에 성 외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경상도 군사 4만여 명이 2일 광주의 쌍고개(雙嶺)에 이르러 진지를 구축했다. 이들은 척후를 보내지 않아 청군이 몰려와 포위작전을 펴는 것을 몰랐다. 아군은 적에게 조총을 쏘아대다가 화약이 떨어져 화약을 달라고 소리를 쳤다. 가까이 접근한 적군 측에서 이 말을 알아듣고 목책을 넘어와 세차게 공격을 퍼부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약심지가 옆에 쌓아놓은 화약에 옮겨붙어 폭발하는 바람에 숱한 군사들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이 전투에서 경상우병사 민영이 죽는 등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남한산성에는 접근도 하지 못하였다.

 5일에는 전라병사 김준룡이 거느린 2천여 명의 군사가 용인 광교산 아래에 이르렀다. 이 부대는 남한산성에 공급할 양곡과 말먹이를 에워싸고 진군했다. 정찰병이 적군이 다가온다고 알려 광교산으로 올라가 군진을 벌렸다. 김준룡이 적의 동태를 살피며 골짜기 요소요소에 복병을 숨겼다. 제 1선에는 포수, 제2선과 제3선에는 사수와 살수를 배치했다. 산 근처에 접근한 청군이 일제히 정상을 향해 뛰어오르는 순간 김준룡은 북을 울리고 기를 흔드는 것을 신호로 복병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적군이 수많은 시체를 버리고 후퇴하자 사수와 살수가 돌격해서 활을 쏘고 창칼로 공격했다. 다음 날 청군의 장수 양구리(楊古利)가 금가면을 쓰고 동남부 진영을 돌파하면서 앞장서서 올라왔다. 숲 속에 숲어 있던 포수가 총을 쏘아 양구리를 넘어트리자 적군은 우왕좌왕하다가 물러났다. 모처럼 기세를 올리던 아군은 양곡과 탄약이 떨어져 포위망을 뚫고 수원으로 후퇴를 했다. 이 전투가 조청전쟁 기간 동안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싸움이었다. 이 전투보고가 남한산성에 전해지자 성안 사람들은 활기를 찾고 고수전을 펴기로 했다.

 강원도 군사는 금단산에서 적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해 용진에 이르러 북쪽에서 내려오는 군사와 합류를 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함경도 군사는 금화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종 서흔남과 승병 두청이 청군 몰래 부지런히 성을 드나들며 임금의 지시문과 바깥 장수들의 보고서를 전달했다. 마침내 이 사실을 눈치 챈 청군은 송성을 엄격하게 지키며 이곳저곳에서 올라오는 근왕병을 차단하는 작전을 강화했다. (한국사이야기12, 이이화, 한길사, 2015, 238~241쪽, 2022.03.18) 

 

 

 

 

 

 

 

 

 

 

 

 

 

 

 

 

 

  @ 1년 전 답사때 초목에 묻인 인발장군 묘소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