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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편 ; 고대도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고대도(古代島)는 조선시대 최초로 개신교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한 곳으로 밝혀졌다. 1832년 7월 17일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독일인 선교사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st Gutzlaff, 1803~1851)가 몽금포 앞바다의 몽금도(대도)에 도착하였다가 난폭한 군중들에게 쫒겨 해상으로 남하하였다. 「일성록」에 순조32년 7월 14일 "고대도안항인박( 古代島安港引泊)"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의 항해기록을 보면 7월 25일에 안전한 항구로 그들의 배를 인도하여 접안하였다고 한다. 그는 고대도 앞 바다에 약 20일간 체류하면서 주민들과 관원들을 만나 선교를 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감자를 파종하고 야생포도(머루로 추정)를 발견하여 포도 재배법과..

제188편 ; 주산 이철원 선생 생가

보령에서는 정부와는 다르게 매년 4월 17일에 3.1절 행사를 진행한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보령(당시 남포군)에는 이철원 선생에 의해 주산 장날을 기해 주렴산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 이것이 보령에서는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날을 '주렴산 3.1만세 운동'이라 칭하고 주민들과 각계인사들이 참석하여 그날을 기린다. 주산면 주민복합센터 경내에 추모비와 기념비가 세워져 이곳에서 '제106주년 주렴산 3.1만세 운동' 기념식이 진행되었다. '주렴산 3.1만세 운동' 이 태동된 곳은 증산리(시루뫼)의 이철원 선생의 집에서 이루어졌으며, 뒷산인 주렴산 국수봉에서 행하여졌다. 국수봉 정상에도 '주렴산 3.1만세 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식에..

제187편 ; 청라 내현리 말무덤

백현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면 ' 내현리의 서쪽 마을로 새터, 만취동, 휘유개를 통칭하여 백현(白峴)이라고 하는데 휘유개의 한자식 표기이다. 마을 남쪽 영매산 끝에 기묘한 바위가 있는데 벼랑으로 된 큰바위 위에 다른 큰 바위가 얹혀 있으며 가운데 끼인 굄돌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지탱되고 있다. 굄돌이 받치고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괸바위라고 부른다.  옛날 여자 장수가 성주산에서 치마폭에 큰 돌을 가져다 굄돌로 받쳐놓고, 어려워서 "휘우"하고 쉬었기 때문에 괸바위와 휘유개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또 휘유개 마을 가운데 리도 201호 도로변에 돌무더기로 된 말무덤이 있는데 옛날 충신 김성우장군이 고려 반천년의 국조가 무너지고 새나라 조선이 창업할 즈음 천지운세의 섭리를 개탄하며 자신의 말을 목베..

제186편 ; 청라 내현리 굉돌 바위의 변화

영매산의 서남쪽 대천천변에 위치하였던 굉돌이 2023년 봄에 발화된 산불로 숲이 완전히 연소되고, 2024년 수해로 붕괴되었다는 지인의 말과 수해로 인한 하천제방 확장공사가 진행 되고 있다는 말에 혹여 제방공사로 전설이 서려있는 굉바위가 공사로 인하여 사라지지나 않을지 궁금하여 답사를 진행하였다. 내 블로그 제26편(2019년02월23일)에 대천천변으로 전설을 담고 있는 벼락바위와 굉바위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나원리에 있는 벼락바위는 2007년도 수해로 완전히 사라졌는데, 굉바위 마져도 5백여년 전설을 담고 있다가 사라졌다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 확인하고 싶었다. ( 위치 비정 ; 청라면 내현리 산1번지)  보령문화 연구원에서 발행하는 '보령문화 제14집(2005)'의 표지 사진으로 굉바위가 인쇄되어 ..

제185편 ; 소양리 이경탁묘 무인석

청라면 소양리 둔터는 원래 한산이씨가 집성촌을 이뤘으나, 모두 떠나고 다양한 성씨들이 살고 있다. 동네 뒷산(소양리 산 15-13)은 한산이씨네의 광대한 종중산(약 10만평)으로 이곳에 세거했던 분들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는 보령지역에서 잘 볼 수없는 석상이 4기가 서있다.  한산이씨의 보령 입향은 이지함의 아버지 이치가 광산김씨 광성부원군 김극성(金克成, 1474~1540)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청라에 들어온 것이 계기가 된다. 이치가 아들을 넷 두었는데, 첫째 지영은 일찍 사망하였고, 둘째가 지번으로 영의정인 산해와 귀학정의 주인공 산광을 낳았다. 셋째가 지무로 명곡을 낳았는데 이분이 둔터에 뿌리내린 한산이씨 명곡파의 시조가 된다. 넷째가 지함으로 산두, 산휘, 산룡, 산겸을 자식으로 두었다...

제184편 ; 남곡동 남서들 상엿집

1. 들어가며   보령문화원에서 2016년도에 보령지역의 상엿집을 전수조사하여 '보령의 상여'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관심을 갖고 몇 곳을 방문을 하였는데, 불과 10년도 채지나지 않은 현재에도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 급속한 소멸이 진행중이다. 장례문화가 급속하게 변하였고, 사람들의 의식도 변해가고 있으니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최소한 보령지역의 문화유산으로 한 곳을 지정하여 전통적인 상엿집과 지역의 전통상여를 수습 복원하여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 보존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보령시 남곡동은 대천천 하류를 끼고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에 접하며 해망산과 왕대산 사이 남서들과 남서쪽으로 건지산 줄기까지의 갈산들을 포함하는 황골, 버들골, 탑동, 번던골, 방골,오룩..

제183편 ; 청라 함열남궁씨 시조묘

1. 들어가며    '60년대 이 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천방지축 뛰어놀았던 공간 중에 이곳도 한 부분이었다. 오래된 소나무 숲 앞에 펼쳐진 묘 앞 잔디밭은 뛰놀기에 적당했으며 석물들에 올라타 무동을 타는 것 또한 시간가는 줄 모르는 놀이였다.  봄인지 가을인지 어느 시기엔 흰옷을 입은 어른들이 묘 앞 상석에 갖은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고 옆집에서 잔치를 벌이면 동네 아이들에게도 떡과 과일, 사탕 등을 나눠주었다. 한 갑자 지나서 위성지도로 그곳을 살펴보니, 묘 앞 잔디밭에 둥근 타원형의 트랙이 보이기에 무엇일까 궁금하여 찾아가 보았다. 장변 20m, 단변 15m 원형으로 중앙부에 낡은 의자가 있고, 사람인지 동물인지가 트랙을 돌아다녔는지 잔디가 누워있는데 경마의 흔적은 아닌듯 하다.  현장을 ..

제182편 ; 보령지역 묘지석 문인상(文人像)

1. 들어가며    웅천의 미륵모퉁이를 규명하기 위해 내포지역의 미륵불을 조사하여 답사를 마치고, 미륵모퉁이가 장승이나 문인석으로 볼 수는 없는지 비교하고자 보령지역에 산재한 묘지석들을 답사하였다.  묘지의 석물에는 고석(鼓石; 상석을 받치는 돌), 곡장(曲墻; 봉분 뒤의 담장), 난간석( 봉분 주위 울타리), 망주석(망두석; 묘의 좌우에 배치하는 기둥), 병풍석(호석; 묘지 둘레를 에워싸는 돌), 상석(床石; 봉분 앞에 설치하는 상모양의 돌), 장명등(석등; 일정 품계이상의 묘에 설치하는 등), 향로석(향로와 향합을 올려놓는 돌), 석마,석양, 석호(무덤 앞에 조각한 말, 양, 호랑이 석상)이 품계에 따라 설치되며,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은 봉분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활을 한다. 무인석은 대체..

제181편 ; 청라 사내사(舍乃寺) 흔적 답사

1. 들어가며    보령문화연구회에서 2024년 4월 27일(토)에 백월산 아래에 위치 하였다는 사내사(舍乃寺) 추정지를 답사하였다.  1715년 충청수영성 자료에 의하면 충청수영의 속사(屬寺)로 청양의 장곡사(長谷寺), 임천의 보광사(普光寺), 한산의 고석사(孤石寺), 보령 오서산의 성당사(聖堂寺),  백월산의 사내사(舍乃寺), 남포의 영흥사(永興寺)로 기록되어 있다.  보령문화연구회에서 2022년 11월 사내사 사지 1차 답사를 하였으나 지표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번 답사로 사지로 비정되길 바라는 바였다.   새내라는 지명은 라원리의 동북쪽, 즉 백월산의 서남쪽으로 펼쳐진 완만한 능선의 깊고 평편한 경사지이다. 전면으로 성주산 장군봉이 바라다 보이고, 멀리 청천 저수지까지 넓은 전망이 보이는 곳으로..

제180편 ; 주산 주렴산 3.1만세운동 추모 기념식

1. 들어가며     일제가 이 땅을 강점했던 초기에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불타올랐다. 보령시에서는 당시 주산면 증산리 출신으로 배재고등학교에 다니던 이종연(추후 이철원으로 개명)이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과 규합을 하여 주산 장날인 4월 16일 거국적으로 만세운동을 하려고 기획하였으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다음날 주렴산의 국수봉에 올라 태극기를 꽂고 횃불을 밝히며 징을 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후 만세운동을 행했던 애국지사들은 왜경의 혹독한 고문과 태형을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일찍 세상을 뜨기도 하였으며, 해외로 망명길을 떠나기도 하였다. 1985년 주렴산 꼭대기에 비를 세우고 주산면민들이 기념식을 거행해 왔으며, 1999년부터 보령시 주관으로 기념식을 거행해 왔다. 또한 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