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86편 ; 청라 내현리 굉돌 바위의 변화

푸른나귀 2025. 1. 25. 11:11

  영매산의 서남쪽 대천천변에 위치하였던 굉돌이 2023년 봄에 발화된 산불로 숲이 완전히 연소되고, 2024년 수해로 붕괴되었다는 지인의 말과 수해로 인한 하천제방 확장공사가 진행 되고 있다는 말에 혹여 제방공사로 전설이 서려있는 굉바위가 공사로 인하여 사라지지나 않을지 궁금하여 답사를 진행하였다.

 내 블로그 제26편(2019년02월23일)에 대천천변으로 전설을 담고 있는 벼락바위와 굉바위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나원리에 있는 벼락바위는 2007년도 수해로 완전히 사라졌는데, 굉바위 마져도 5백여년 전설을 담고 있다가 사라졌다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 확인하고 싶었다. ( 위치 비정 ; 청라면 내현리 산1번지)

 

 보령문화 연구원에서 발행하는 '보령문화 제14집(2005)'의 표지 사진으로 굉바위가 인쇄되어 있다. 표지 설명으로 《보령의 지명≫에서 괸바위(굉바위)에 대해 적어 놓았다.

  보령시 청라면 내현리 영매산 끝에 있는 바위로, 벼랑으로 된 큰 바위 위에 다른 큰 바위가 얹어져 있는데, 가운데 끼인 작은 굄돌 때문에 괸 바위라 부른다. 옛날 여자 장수가 성주산에서 치마폭에 큰 돌을 가져다가 굄돌로 받쳐 놓고 어려워서 "휘유"하고 쉬었기 때문에 "휘유개"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보령문화 제14집, 보령문화연구회, 2005 발췌)

 

 백현마을(휘개) 입구 정자에 차를 세우고 공사중인 하천변을 따라 서남쪽으로 0.7Km 걸어가면 영매산 끄트머리가 나온다.

 영매산 끄트머리 개울 옆으로 벼랑바위에 굄돌에 받혀있던 굉돌은 수해로 약 반바퀴 정도 돌아가서 변형을 이뤘지만 다행히도 완전 붕괴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2019년도에 비해 굄돌이 빠지면서 개울쪽으로 더 기울어진 형태이다.

 대천천 제방공사가 굉돌바위 바로 아래까지 진행중이어서 혹여나 공사로 인하여 굉돌바위가 훼손될 우려가 되어 내현교 옆에 설치된 공사현장을 찾았다. 담당자를 만나 제방공사의 연장으로 굉돌이 파손되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파손이 이루어진다면 민원을 청구하여서라도 막으려는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굉돌은 건드리지 않게 설계되었다는 담당자의 말에 전설이 서려있는 굉바위는 이마을이 생겨나면서 전해지는 전설 또한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기에  훼손하지 않도록 거듭 당부하였다.

 

 한 때는,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휘개동네와 새터 동네 아이들이 물장구치고 다이빙을 하면서 놀았고, 어른들은 물고기 잡으며 천렵을 즐기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도시로 나간 그 아이들의 기억 속엔 굉바위가 항상 자리하고 있고, 언젠가 한번은 찾아보리라는 마음을 갖고 살 것이다.  마을이 존재하고 주민들이 살아가는 한 전설은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갈 것이다.

 산불이 난 영매산을 오르면서 옛날 고린장터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어두컴컴한 굴속에서 무엇인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달아나던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가파른 영매산 능선을 훓터보았지만, 고린장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반 봉분과는 달리 군용벙커와 같이 입구가 열려있던 무덤은 토곽묘나 석곽묘였을텐데, 그때는 늙은부모를 내다 버리고 그 구멍을 통해 물과 음식을 공급해주며 죽기를 바랐다는 고려장으로 생각했었다. 

 청천 저수지로 수몰된 평정마을에 고인돌 3기가 있었으니 이곳은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왔다는 증거가 된다.  고려장으로 불리던 이곳의 고린장터는 백제시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서너번의 큰 산불과 수차례의 수해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데 큰 아쉬움이 남았다. 

 

   @ 2024년도 수해로 인해 변형이 된 굉바위 전경

   @ 굉바위가 수해로 반쯤 굴러 벼랑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다.

    @ 산 중턱에서 바라본 굉바위 모습

    @ 2024년도 수해로 인한 대천천 정비공사가 한창이다.

   @ 2019년도 2월에 답사하면서 촬영된 굉바위의 원형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