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87편 ; 청라 내현리 말무덤

푸른나귀 2025. 1. 25. 19:39

  백현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면 ' 내현리의 서쪽 마을로 새터, 만취동, 휘유개를 통칭하여 백현(白峴)이라고 하는데 휘유개의 한자식 표기이다. 마을 남쪽 영매산 끝에 기묘한 바위가 있는데 벼랑으로 된 큰바위 위에 다른 큰 바위가 얹혀 있으며 가운데 끼인 굄돌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지탱되고 있다. 굄돌이 받치고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괸바위라고 부른다. 

 옛날 여자 장수가 성주산에서 치마폭에 큰 돌을 가져다 굄돌로 받쳐놓고, 어려워서 "휘우"하고 쉬었기 때문에 괸바위와 휘유개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또 휘유개 마을 가운데 리도 201호 도로변에 돌무더기로 된 말무덤이 있는데 옛날 충신 김성우장군이 고려 반천년의 국조가 무너지고 새나라 조선이 창업할 즈음 천지운세의 섭리를 개탄하며 자신의 말을 목베어 죽여 이 곳에 묻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말무덤 앞에는 "순주열백옥마(殉主烈白玉馬)"라고 새긴 비가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백현마을 유래비 발췌)

 

 내현리는 일제강점기 행정개편으로 당내리(堂內里)와 백현리(白峴里)가 통합되면서 가운데 글자를 따와 내현리(內峴里)가 되었다. 백현동네에는 청라에서 장산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를 백현고개, 휘개고개, 장골고개 또는 백토고개로 일켵는데 흰흙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백토는 고령토를 말하는데 도자기를 굽는 원재료이다. 언젠가 이 곳에서 도기를 굽던 시절이 있었지 않은지 확인해 볼 필요성도 있겠다. 휘우개라는 지명도 숨을 몰아쉬며 '휘우'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전설보다는 휘인 하천을 뜻하는 '휘인(휘다)+개(냇가)'로 풀이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대천천이 상중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벼락바위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고 내려오다가 수랑뜰을 지나 내현천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산을만나 급격히 휘어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즉 대천천이 감아돌며 백현마을을 이룬다. 휘유개는 감아도는 대천천 북쪽 산고랑의 마을로 영매산 줄기에 형성된 마을 이름이다.

 

 말무덤은 스므티의 말바위가 김성우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는데, 이 곳 또한  김성우장군과 결부되어 장군이 말을 죽여 이곳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암성분이 있는 바위라서 그런지 검게 그을린 비에는 "순주열백옥마총(殉主烈白玉馬塚)"라고 쓰여있고, 자연석을 대체로 다듬질 생략하여 글자는 음각하였다. 언제 누가 각자를 하였는지 확인이 어려운데 아마 후대에 전설을 인용하여 새긴 것 같다.

 말무덤은 전국적으로 많은 지명으로 남아 있다. 대체로 말무덤(言塚)이라하여 사람 입에서 나온 말(言)로 인한 구설수를 막기위한 부류와, 주인에게 충성스런 말(馬)을 묻어주었다는 부류의 전설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휘개고개 입구의 말무덤은 예전부터 낮은 높이의 흙 봉분을 한 형태로 전래되고 있는바, 예전 백제시대의 굴식돌방무덤일 가능성을 검토해 볼 필요성도 있어 보인다. 대천천변으로 건너편에 넓은 농경지가 있고, 뒷편으로 야트막한 산들이 구릉을 형성해 주어 남향받이 토족의 무덤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겠다.  현재 봉분에는 흙과 돌덩어리가 산재하여 무덤 같이 보이지 않지만 예전부터 말무덤이라고 전하여졌으니 한번 고고학자들의 발굴조사도 필요하겠다. (위치 ; 청라면 내현리 790-1) 

 

   @ 백현마을 정자 앞 안내도

   @ 도로에서 바라본 말무덤

   @  말무덤의 안내판과 순주열백옥마총(殉主烈白玉馬塚)비

   @ 말무덤의 안내판

   @ 순주열백옥마총(殉主烈白玉馬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