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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산(제35편 ; 미산 병목산)

1. 들어가며 낙엽이 떨어지고 농삿일이 끝나면서 몸뚱아리가 근질 거리기 시작한다. 등산로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산봉우리들의 탐방에 마음이 끌리어 작년 봄에 멈추었던 스틱을 잡아 보았다. 깊숙한 도흥리 골짜기를 따라 비득재 정상 농장 앞에 차를 대고 임도에 들어서니 좌측능선으로 띠지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초입에 잡목들로 약간 주춤거리다가 선명하지 못한 등산로를 찾아 산속으로 들어선다. 정비되지 않은 산행로에 가랑잎으로 펼쳐지는 짐작되는 길로 한걸음 한걸음 찾아 올라보는데 산행객보다도 산짐승들의 발길이 더 많았을 것 같다. 두어번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 바로 정상이 보인다. 나무들에 의해 주변의 풍광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낙엽이 진 뒤에라 홍산 땅이 보인다. 멀리 옥산저수지도 보인다. 정상에서..

보령의 산 2023.12.11

제54편 ; 옹진 승봉도(인천)

1. 들어가며 가을이 익어가는 계절에 학우들과 인천 앞바다의 승봉도를 찾았다. 연안부두에서 서남방향으로 여객선으로 한시간 반 가량을 달리면 자월도를 거쳐 소이작도와 대이작도와 가까이 면적 6.39km의 작은 섬 승봉도에 닿는다. 가구 수가 80여 호, 주민 수가 70여 명이란다. 육지로의 이주가 지속적으로 이뤄져 빈집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일게다. 주민들은 적은 농지에 농사를 지으며 어업을 겸업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척박한 섬 살림을 활성화하기 위해 인천의 도심과 연계하여 식당, 팬션, 상가들을 운영하고, 섬지역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을 모집하여 바지락 체험, 꽃게잡이 체험, 선상낚시 체험 등과 섬 둘레길 답사를 겸한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섬 주민의 수익 창출에 활발하게 힘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승봉리 ..

제175편 ; 청라 김성우 장군 추모 제향

1. 들어가며 양력 11월 1일 11시에 추모 제향 행사가 시작 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인 1(하나)를 의미한다는 진행자의 말처럼,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는 과정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승화한 장군의 넋을 기리고자 장군봉이 바라다 보이는 발산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발산(鉢山)을 지역 사람들은 '바래미' 혹은 '바리미'라고 불리었다. 발산이라는 지명이 국내에서도 여러곳에 산재하는데, 이것은 둥그스름하고 밋밋한 동산의 형태를 가진 지형을, 즉 절에서 승려들이 쓰는 밥그릇 바리때를 엎어 놓은 형상의 지형을 말하는데 우리땅 이름이 한자화 하면서 발(鉢 ; 바리때 발)로 변형된 것으로 본다. 제향을 지내는 동안 청천저수지에서 라원 들판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이 골바람이 되어 현수..

제53편 ; 서안 비림박물관(중국 8)

1. 들어가며 비림(碑林)은 원래 공자를 모시던 사당이었다. 그러나 북송 원우 2년(1087년)에 건설된 것으로 지금까지 9백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나라로 부터 근대까지의 비석, 묘지를 4천 개 정도 보존하고 있으며, 서안에서 수집한 비석 1,000여 점을 보유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글과 그림을 새긴 비석들이 숲처럼 빽빽하게 들어 섯다하여 비림이라 불린다. 비림박물관은 무덤의 비석, 공적비, 서예가의 작품이라는 세가지 요건을 갖춘 비들을 모아 전시를 하는데, 비림에 보존하고 있는 비각은 시대의 순서가 완전하고 각종 서법이 겸비되어 가치가 높다. 정문을 들어서면 비림(碑林)이라는 비각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기단부과 몸체, 갓머리로 구성된 석대효경(石臺孝經)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당현종이 ..

제52편 ; 서안 회민거리, 장안성(중국 7)

1. 들어가며 중국에 들어온 아랍인들이 중국인들과 결혼해 정착하며 살아온 민족이 회족(후이족)이다. 당나라 시대 종교가 다른 이민족들을 수용하면서 회족들은 장안의 고루와 종루에 가까이 이슬람사원을 세우고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아편전쟁 당시 170여 만명이 거주하였다는데 현재는 산서성에 사는 인원이 5만여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회족거리에는 야시장을 즐기려는 관광객들과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다. 간단하게 간식을 즐길 수도 있으며, 상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회민거리 끝으로 나오면 종루와 고루가 있는 광장이 나오는데, 관광객과 시민들이 어울려 시안의 밤풍경을 즐기고 있다. 고루 중앙엔 큰 북을 달고, 사방으로 24절기를 표시하는 작은 북을 달려 있으며, 북을 치는 것으로 성문을 열고 닫았다고 한다. 장안..

제51편 ; 서안 진시황 병마용갱(중국 6)

1. 들어가며 고조선이 멸망하던 시기보다 이른 시기인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시황제(始皇帝)라 칭하였다. 시황제는 군현제 실시, 진문자로 통일, 만리장성 개축, 아방궁 건설 등으로 강력한 법치를 행하여 영원한 제국을 세우며 불사의 꿈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진시황도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진나라도 얼마되지 않아 역사속에 사라진다. 1974년 이곳에 살던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이상한 점토 파편을 발견하게 되면서 2,200년 전에 묻힌 진시황릉의 실체를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병마용갱의 부지는 상당히 넓게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당국에서 유물의 발굴지가 어디까지인지 불확실하기에 최대한 부지를 넓게 확보하고 보존하기 위함이란다. 이 지역 어디든 삽으로 땅을 파면 유물이 나온..

제50편 ; 화산 서봉 (연화봉)(중국 5)

1. 들어가며 중원에 우뚝 솟은 화산(華山)은 서악(西岳)으로 꼽히며, 평원에 마치 연꽃 봉우리처럼 아름답게 펼처져 있다고 이름 붙여진 명산이다. 산아래 주차장에서 공원관리소 측이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가는 길이 여간 험한게 아니다. 금방이라도 바위 덩어리가 굴러 떨어질 것 같고, 버스 바퀴 한쪽이 벼랑쪽으로 빠질 것 같은 걱정이 앞서는데도 운전사는 내려오는 차들과 아슬아슬하게 교행하면서 잘도 달린다. 7~80년대 강원도 운전사들과 실력이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며 좌석에 설치된 안전띠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셔틀버스에 내려서도 한참이나 여러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가야 정거장이 있는데, 중국인들의 상술이 세계적이라더니 관광객의 동선을 상점들 사이사이로 연결하여 걸어야 할 발걸음 ..

제49편 ; 등봉 소림사와 탑림(중국 4)

1. 들어가며 신라가 한반도를 통합한 이후 불교계는 원효와 의상대사로 대표되는 교종이 왕족과 권력층에 의해 발전을 해왔다. 교종(敎宗)은 법상종, 화엄종, 삼론종 등으로 나뉠 수 있는데 형식과 교리, 경전을 중시하는 종파이다. 한편 선종(禪宗)은 교리, 경전 보다 구체적인 실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을 중시하는 종파로 신라의 후기인 9세기에 당나라에 유학 온 구법승려들에 의해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융성해진 종파이다. 중원의 오악(五岳) 중 중악(中岳)에 해당하는 숭산(崇山)의 산자락에 둥지를 튼 소림사는 북위시대에 세워진 절로, 527년 달마대사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수년간 면벽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어 선종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면벽수행을 하느라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수행자들이 많아지자 달마..

제48편 ; 곡부 공림(孔林)(중국 3)

1. 들어가며 공자(B.C 551~ B.C 479)는 하,은,주나라의 왕조가 가장 백성에게 이로운 정치였다고 생각하고, 특히 주나라의 통치개념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며 주나라의 예(禮)와 악(樂)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정치실현을 추구하였다. 주나라가 쇠망의 길로 접어들면서 대륙은 혼란에 휩싸이면서 군웅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든다. 그 와중에 수 많은 지식인들은 어떤 정치가 왕에게 혹은 백성들에게 이로울지를 연구하게 되면서 많은 논리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진시황제가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받아들인 정치논리는 법가(法家)였고, 그 외의 논리들은 통일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며 분서갱유라는 극단의 조치를 강행하게 되어 다른 사상가들은 초야에 묻혀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그치게 된다. 유가(儒家)는 그 후 당..

제47편 ; 곡부 공부와 공묘(중국2)

1. 들어가며 곡부는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도읍지로 공자가 태어난 곳이며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던 곳이다. 청도 비행장에서 내려 전날 연태를 들러 답사를 하였고, 다음날은 오전에 제남의 태산을 관광한 후, 공자와 관련된 공묘(孔廟), 공림(孔林), 공부(孔俯)를 답사하기로 일정이 잡혔다. 공묘는 공자가 살면서 교육을 하였던 장소이며, 공림은 공자를 비롯한 공씨 가문들의 유택들로 조성된 공원이며, 공부는 공묘를 중심으로 공씨들이 모여 살던 집단 거류지이다. 공묘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 입구로 들어서니 우측으로 성벽과 같이 높고 긴 담장을 끼고, 좌측으로 상점들이 즐비한데 공자의 몇 대손이라는 간판이 눈에 자주 보인다.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성조 때문인지 귀에 거슬리게 들린다. 공묘(孔廟)는 입구에서 대성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