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919

제46편 ; 태산(중국 1)

1. 들어가며 백제시대에도 영토 내의 높은 산을 오악(五岳)으로 정하고 하늘에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사회사상사, 노종국, 지식산업사,2010.4) 그에 의하면, 북악(北岳)을 오서산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오산과 오서악은 '烏'자를 공유하고 있으며 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보았을 때 모두 북쪽에 자리하고 있고, 오서악의 백제 당시의 이름은 오산이며, 오합사라는 절 이름도 오산과 연계되어 지어진 것으로 보았다. 중국의 중원도 다섯개의 높은 산에 빗대어 북악을 항산(恒山), 동악에 태산(泰山), 중악에 숭산(崇山), 서악에 화산(華山), 남악에 형산(衡山)으로 정하고 황제가 직접 하늘에 제를 지냈다. 산동성 태안시는 지명이 같다는 이유로 충남 태안군과 1997년 4월에 자매결연을 맺어 다양한 교류를 ..

제174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4. 서안 지상사)

1. 들어가며 서안(西安)은 당나라 시대의 도성 장안(長安)이다. 대륙의 중원은 산물이 풍요로워 관내 토족들의 군웅할거와 이민족들의 침탈로 평화로웠던 시기가 별로 없었지만, 당나라가 수도로 삼으면서 한동안 인접 국가는 물론 멀리 유럽까지 실크로드가 연결되어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문화와 문명의 중심지인 국제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도 티벳을 거쳐 중국대륙에 꽃을 피우고 다시 아시아 대륙의 곳곳으로 전파되게 되었다. 당과 신라의 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한반도는 신라와 발해라는 남북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지만, 아쉽게도 신라와 발해는 한민족이면서도 교류가 소원하게 되어 각기 당과의 교류를 하면서 경쟁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라의 왕족과 상층부 자식들은 종교인과 유학생으로 당의 선..

제173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3. 영제 만고사)

1. 들어가며 보령의 향토연구자들은 무염국사가 스승 마곡보철을 마곡사에 머무는 보철 스님일 것이라는 가정하에 중국 최초의 선종사찰이라는 마곡사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곡사라는 절은 찾지 못하였고, 현재 설화산의 옛이름이 마곡산이라 불리었으며, 그곳에 마곡사라는 이름과 비슷한 만고사(萬古寺)가 있고, 만고사의 일주문에는 '중원제일선림(中原第一禪林)'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기에 이곳을 무염국사가 선종 10조의 심인을 받은 마곡사이거나, 마곡사가 훼철 된 후 근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만고사가 창건된 연대는 854년(당대중 11년)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무염국사가 귀국한 이후의 일이라서 확실하게 무염국사가 이곳을 거쳐간 것인지 의문이 들지만, 다보불탑(多寶佛塔)의 안내판을 보면 다보불탑이 처..

제172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2. 낙양 용문석굴과 향산사)

1. 들어가며 도도히 흐르는 이허(伊河)의 물줄기는 천년의 세월을 어제와 오늘로 이어주는데, 정을 쪼으던 장인들과 석굴 속에서 밤낮 없이 진리를 구하던 구도자들, 그리고 축원을 위해 몰려들던 민중들의 기원이 모두 이루워졌을까? 이허의 강물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용문산 기슭과 동쪽의 향산 기슭에 위진남북조에서부터 당나라에 걸쳐 암벽에 석굴 사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국가적으로 크게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북위의 효문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정한 이후(493년)부터 조성된 이곳의 석굴은 무려 2300여 개, 불상은 10만여 개에 달한다. 석굴은 북위 시절에 3분의 1 가량이 설치되고 나머지 대부분은 당나라 시절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최근에 어느 학자에 의해 신라인이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석굴 '신라상감(新羅像龕)..

제171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1. 연태 양주묘)

1. 들어가며 보령문화원에서 매년 시행하던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3차)'가 코로나 발생으로 4년 간 중단 되었다가, 올해 10월 11일(수)에 5박 6일의 여정으로 진행되었다. 무염국사(800~888)는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성주사를 중창하고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을 연, 성주사지에 남아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찬한 국보 낭혜화상비의 주인공으로 보령지역의 위대한 인물이다. 무염국사는 무열왕의 9대손으로 유교경전을 공부하였으나 불교로 출가를 하여 18세(818년) 때 영산강 하구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사단(斜斷) 항로로 가다가 난파 당하여 실패하고 22세(822년) 때 다시 당은포(현 남양만 전곡항 추정)에서 출발하는 횡단(橫斷) 항로를 이용하여 왕자 흔이 조정사로 중국에 가는..

제45편 ; 일두 고택 (함양 4)

1. 들어가며 남계서원에서 강을 건너 약 3km 떨어진 개평마을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된 일두고택이 있다. 경남지방의 대표적인 전통한옥으로 대지 3천여 평, 12동의 건물로 일두 정여창 선생이 세상을 뜬 뒤인 1570년 후손들에 의해 사대부가의 면모를 갖추어 건축되었으며, 184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되었다고 한다. 골목에서 행랑채 사이로 난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누마루가 붙어있는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는 마당에서 1.2m 정도 높이에 기단을 조성하고, 누마루를 높여 통풍과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다. 외부인이 안채로 들어가는 것을 통제하기 위한 좁은 중문과 별채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도록 작은 홍예문을 설치한 것이 흥미롭다. 유가(儒家)에서는 조상의 음덕을 받고자 사당과..

제44편 ; 남계서원(함양 3)

1. 들어가며 남계서원은 최치원 역사공원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10km 떨어진 수동면 원평리 586-1에 위치하며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등록된 9곳의 서원 중 한 곳으로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서원은 16~17세기 조선 시대 지방 교육의 요람으로 성리학적 가치관을 확립하고, 문묘 종사의 제향을 봉행함으로써 학파의 결집을 도모하였던 사립형태의 교육기관이었다. 이곳의 건축양식은 남서향으로 남강(남계, 蘫溪)과 들판을 바라보며 나직한 언덕 위로 정문인 풍영루를 거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배치하고, 한 단 높은 곳에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명성당이 자리하며, 그 뒤 경사지에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全學後廟..

제43편 ; 최치원 역사공원(함양 2)

1. 들어가며 오전 상림원 답사를 마친 후 오후에 최치원 역사공원으로 발길을 하였다. 역사공원은 천년의 숲 상림공원과 연계하여 함양군이 2018년 4월에 준공하였고 함양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선생의 덕과 학문, 애민정신을 기리고자 조성하였다고 한다. 입구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좌측으로 선생의 일대기를 벽면에 빼곡하게 구성해 놓은 역사관이 있으며, 우측으로 상림원의 조성역사 흐름에 대하여 전시한 상림관을 배치하여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문화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계단 위쪽으로 정문인 외삼문이 축조되었으며 안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배치된 고운 기념관에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대체로 근래에 축조된 건물이고 단청이 없어 고색창연한 미는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지역만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

제42편 ; 상림원 최치원 신도비(함양 1)

1. 들어가며 함양 산삼 축제(9.7~9.12)는 그 기원을 신라시대 최치원이 중국 당나라와 왕래하면서 산삼을 무역 거래품목으로 하던 것을 기원으로 삼고 고운 선생을 산삼의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고 한다. 축제장을 벗어나 상림원에 위치한 ‘문창후최선생신도비(文昌候崔先生神道碑)'를 답사하였다. 이 비는 1923년에 세운 것으로, 신라 진성여왕 때 천령군(현 함양군) 태수로 부임한 고운 최치원이 지리산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여 홍수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였다는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신도비 옆으로 근래에 세운듯한 사운정(思雲亭)이란 정자가 고운 선생을 사모하는 함양군민의 마음이 되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한다. 불타는 듯한 꽃무릇의 만개가 산..

제170편 ; 명곡 이산보 부조묘

1. 들어가며 보령 출신 인물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토정 이지함 선생의 조카이며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피난길에 호종을 하고 명나라 지원병이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주춤거릴 때, 간곡한 설득으로 파병을 결정하게 하는 외교적 지략을 펼쳤으며, 명나라 군사들의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헌신을 한 명곡 이산보 선생이 있다. 선생의 조부 이치가 광신김씨 김극성의 누이와 결혼하여 청라면 장산리 서원마을에 정착을 하여 지영,지번,지무,지함을 낳았는데, 큰아들 지영이 일찍 타계하여 지무의 작은 아들인 산보가 양자로 입적을 하게 되지만 지무의 큰아들이 죽자 다시 파양을 하여 지무의 계를 잇는다. 명곡이란 호가 큰아들에게 입적할 당시 한산 집성촌이 있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처럼 파양 후에도 양어머니에게도 효를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