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71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1. 연태 양주묘)

푸른나귀 2023. 10. 20. 16:23

1. 들어가며

  

      보령문화원에서 매년 시행하던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3차)'가 코로나 발생으로 4년 간 중단 되었다가, 올해 10월 11일(수)에 5박 6일의 여정으로 진행되었다.

 무염국사(800~888)는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성주사를 중창하고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을 연, 성주사지에 남아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찬한 국보 낭혜화상비의 주인공으로 보령지역의 위대한 인물이다.

 무염국사는 무열왕의 9대손으로 유교경전을 공부하였으나 불교로 출가를 하여 18세(818년) 때 영산강 하구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사단(斜斷) 항로로 가다가 난파 당하여 실패하고 22세(822년) 때 다시 당은포(현 남양만 전곡항 추정)에서 출발하는 횡단(橫斷) 항로를 이용하여 왕자 흔이 조정사로 중국에 가는 편에 함께하여 지부산(之罘山) 기슭에 도착한다.

 신라는 중국 당나라와의 교역에 의주를 경유하여 요동반도를 이용한 육로길을 이용하거나 육지를 끼고 운항하는 연안 항로를 이용하지 못한 것은 대치관계에 들어선 발해국을 피하기 위해 험난한 경로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지부산 기슭에 도착한 무염은 서해바다의 험난한 항로를 헤치며 중국땅에 이른 것을 얼마나 기뻐하였으면 그곳에 모셔저 있는 해신(海神)에게 두 손을 가슴까지 올리는 토읍의 예를 하였다고 낭혜화상비에는 기록되어 있다.

 유목민이었던 강족(羌族)의 강태공이 세운 제나라의 땅으로 예전부터 해신과 제지팔신(斉地八神)을 모시는 풍습이 이어져온 산동성에는 불교사원 보다 도교사원이 주를 이룬다. 무염국사가 험난한 항해길에 무사히 건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신에게 경의를 올렸는지 이해가 된다.

 무염국사가 지부산 기슭에 당도하고 해신에게 토읍한 곳이 어딘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 해신을 모시는 도교사원이 이곳 양주묘(陽主廟)이니 지부산 아래 이 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된다.

 

 양주묘는 산 기슭 아래 평편한 곳에 위치하며 입구에 붉은 도포를 두른 해신상이 서 있다. 측면에는 진시황릉의 병마용총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진시황이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이곳 지부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을 전하는 전시물이었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사원이나 사당의 외문은 솟을대문의 3문으로 되어 있어 중앙의 문은 신이나 성인이 다니는 길이라 닫아 놓고 좌우측 문을 이용하여 일반인들의 통행을 유도하는데 중국 땅에는 그런 개념이 없는가 보다. 도교사원에서 도를 수행하는 수행자는 보이지 않고, 초최하고 무심한 관리인인 듯한 사람만이 이따금 보인다. 사회주의 국가라서 그런가? 해신상 앞에 합장으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무염국사가 험난한 항로를 통해 이곳에 도착한 지부항 부근을 찾아 천년 전 무염대사가 밟았을 발자취의 흔적에 내 발자욱을 얹어 보았다. (보령문화 제28집, 보령문화연구회, 2019, 279~322쪽, 성주사 무염국사의 구법행로 답사(신재완) 참조) 

 

  

   @ 연태에 위치한 양주묘(陽主廟) 전경

   @ 양주묘 입구에 위치한 해신상으로 해신사정(海神賜灯, 灯은 燈의 속자

   @ 양주묘의 외문은 중앙에 오성홍기가 걸려있고 밖을 바라보면 해신상이 정면으로 보인다.

   @ 양주묘의 내문은 마당에서  2m정도 높은 곳에 대지를 잡고 있으며 도교사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 사당 내 중앙에 모셔진 봉공해신랑랑위지(俸供海神娘娘位之), 해신이 여신임을 말한다.

   @ 사당 측면으로 모셔진 제지팔신(斉地八神)의 형상. 좌우로 열명의 지하 판사가 인간의 죄를 측정한다고 한다.

   @ 앞 마당에는 병마용총의 모형이 나열되어 있는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이곳의 산에서 하늘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 무염국사가 신라를 떠나 처음으로 도착한 지부항의 현재 모습

   @ 중국의 동해인 황해에 접한 지부항. 그 어디쯤에 무염의 발자취가 뭍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