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70편 ; 명곡 이산보 부조묘

푸른나귀 2023. 7. 28. 20:39

1. 들어가며

 

     보령 출신 인물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토정 이지함 선생의 조카이며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피난길에 호종을 하고 명나라 지원병이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주춤거릴 때, 간곡한 설득으로 파병을 결정하게 하는 외교적 지략을 펼쳤으며, 명나라 군사들의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헌신을 한 명곡 이산보 선생이 있다.

 선생의 조부 이치가 광신김씨 김극성의 누이와 결혼하여 청라면 장산리 서원마을에 정착을 하여 지영,지번,지무,지함을 낳았는데, 큰아들 지영이 일찍 타계하여 지무의 작은 아들인 산보가 양자로 입적을 하게 되지만 지무의 큰아들이 죽자 다시 파양을 하여 지무의 계를 잇는다. 명곡이란 호가 큰아들에게 입적할 당시 한산 집성촌이 있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처럼 파양 후에도 양어머니에게도 효를 다하였다.

 명곡선생은 숙부인 이지함과 함께 화암서원에 효제충신과 호국충절로 제향되고 있다. 

 이산보 부조묘는 예산 광시면 장신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원래는 그의 고향 보령 청라면 장산리에 건립 되어 있었는데 후손들이 1885년 3월에 이건하여 봉안된 것이다. 부조묘(不祧廟)는 불천위사당 혹은 사우라고도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4대 봉사가 끝나면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올리지 않는데 불천위는 사당에 신주를 영구히 모시면서 제향을 지내는 것으로 나라에서 공신으로 추대된 인물에 불천지위를 받아야만 가능하다.

 장산리 아랫장골에 위치한 명곡선생의 유허비가 선생이 살았던 삶의 터전이었음을 말해주 듯 임진왜란 말기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다 순국한 홍주에서 시신은 고만리 선영에 묻히고, 고향에는 부조묘가 조성된 것이다.

 

 장산리에 있었던 부조묘로는 광산김씨 김극성의 사우가 청천저수지 수몰로 청소면 재정리로 1960년도에 옮겨졌는데, 이산보의 부조묘는 그보다 한참 전인 1885년에 예산으로 옮겨졌으니 아마 한산이씨들의 보령 입향지에서 후손들이 주변으로 많이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장산리 부근에 형성된 한산이씨 집성촌은 이산해의 동생인 이산광의 후손들이 명대계곡 주변으로 형성되고, 시내 관촌마을 주변으로 과암공 후손들 등이 산재하여 있다. 

 예산에 있는 부조묘는 솟을대문 태극문양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사우가 보인다. 현액은 명곡선생부조묘(鳴谷先生不祧廟)로 걸려있고 문고리를 벗기자 제단과 신위함이 정면에 배치되어 있다. 명곡학술세미나(2021)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명곡선생의 영정도 함께 걸려 있다고 하였는데 보이질 않는다.

 답사겸에 제향을 드리려고 신위함을 열고 보자가를 벗겨보니 두분의 신위이다. 명곡선생과 부인의 신위(덕수이씨, 이순심)가 함께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제향을 드리고 밖으로 나오니 대청마루 옆에 편액이 세워져 있는데, 내용으로는 서기 1638년 무인 3월 충간공 탄생지 보령군 청라면 장산리(현 유허비 소재)에 부조묘 봉안, 서기 1885년 기유 3월 현재 봉안된 위치로 이안(移安), 서기 1997년 정축 중추 중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청라에서 예산으로 옮길 때 대들보인 상량보는 가지고 간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예산군에서 지역 지방문화재로 등재되지 못한 것 같은데, 아계 이산해의 묘가 대술면에 있기에 사촌지간인 이산보의 부조묘와 함께 엮어보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지리적으로 약 20km 근접해 있다.

     

 

  2. 참고자료

 

   @ 위치 ; 예산군 광시면 장신리 698번지

 

   @ 충간공 명곡 이산보 부조묘(忠簡公 鳴谷 李山甫 不祧廟)

      명곡 이산보(李山甫, 1539~1594)를 기리기 위한 불천위 사당(부조묘)이다. 일반적으로 4대 봉사(奉祀)가 끝나면 신주는 땅에 묻고 더 이상 제사를 올리지 않지만, 특별한 공을 세운 인물에 대해서는 나라에서 자손 대대로 제사 올리는 것을 허락하는 신주가 '불천위'이고 그 신주를 모시는 곳이 부조묘(불천위사당)이다.

 이산보는 한산이씨로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이며 토정 이지함의 조카이다. 문과 급제 이후 관직생활 중 선정을 베풀고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을 떠나자 호종 하였다.전쟁 중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설득해 명나라 군대를 조선으로 들어오게 하였으며, 전란으로 인해 벌어진 대기근을 수습하던 중 홍주(현 홍성)에서 과로로 순직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이 부조묘는 이산보의 고향인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 건립 되었다가 11대 후손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1885년 함께 옮겨왔다. (현장 안내판 참조)

 

   @ 명곡 이산보 선생의 부조묘 전경

   @ 우측 담장에서 바라본 부조묘 

   @ 전면 3칸 측면 1칸으로 된 맞배지붕 형태로 조성되었다.

    @ 뜰안 우측편에서 바라본 부조묘 전경

   @ 현액은 명곡선생부조묘(鳴谷先生不祧廟)로 걸려있다.

   @ 부조묘 중건기의 현액이 마루 한켠에 세워져 있다.

   @ 실내 명곡선생의 신위함

   @ 신위함 내부의 모습은 명곡선생과 부인 덕수이씨의 신위가 보자기와 뚜껑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 충간공 명곡 이산보 부조묘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