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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편 ; 지우펀과 스펀(대만 6)

1. 들어가며 지우펀과 스펀은 타이페이에서 가까운 북쪽 해안가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우펀(九份,구분)은 청나라 시절 아홉 집 밖에 없던 외진 마을이라 불리게 된 마을명이다. 원래 이곳에 금이 난다는 것을 원주민들도 알고 있었으나 일본군이 대만을 점령한 후에 본격적으로 광산을 개발하게 되었다. 일본은 동남아에서 붙잡혀온 포로들을 금광에서 강제노역을 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70년 대 초 폐광이 되고 한동안 마을이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찻집, 기념품 가게, 까페 들이 들어서면서 대만의 주요 관광지로 변하였다. 좁은 골목길을 통해 언덕을 오르면 일본식의 집들이 어깨를 붙이고, 개점을 한 상인들의 호객소리가 요란하다. 골목마다 홍등이 달려있어 저녁나절이면 중국풍을 확연하게 ..

제19편 ; 태로각 협곡(대만 5)

1. 들어가며 태로협곡은 하류부분의 장춘사, 중류부분의 연자구(燕子口), 상류부분의 구곡동(九曲洞) 등으로 불리는 석회암층의 깊은 계곡으로 화련의 명소로 정식명칭은 타이루거 국가공원(太魯閣 國家公園)이다. 태로각 협곡으로 들어서는 입구의 강 폭은 굵은 돌과 강자갈로 넓게 분포되어 있지만 흐르는 강물의 폭은 좁았다. 중앙산맥이 태평양에 면한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기에 빠른 유속으로 쉽게 빠져 나가기에 우기에는 많은 유량을 보일 것이나 평소에는 유량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좁은 물길을 가지나 보다. 좁은 2차로의 구불구불한 길을 천천히 운행하는 버스에서 창밖으로 기암괴석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수에 눈길이 가고, 협곡 사이로 잠시 드러나는 하늘엔 운무가 춤을추며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바위 틈으로 솟구치는 물줄기..

제18편 ; 청수단애(대만 4)

1. 들어가며 대만은 남북으로 길게한 고구마 모양으로 된 땅으로서 태평양 쪽으로 붙어 중앙산맥이 동고서저(東高西低) 지세로 3천~4천m 봉우리를 이루며 이어져 있다. 타이페이 시내에서 두어시간 고속도로를 타고 화련으로 가는길은 마치 우리의 동해안을 스쳐지나가는 듯하지만 험난함은 더한 길이다. 어쩌면 울릉도의 순환도로를 달리는 듯한데 더 가파르고 높다고나 할까? 중앙산맥이 태평양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면서 산맥을 따라 터널과 고갯길로 허리를 휘감고 높은 교각의 다리를 건너 강을 지나는 풍광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꽤나 긴 터널을 통과해 나타난 청수단애(淸水斷崖)는 태평양의 높은 파도와 바람에 의해 수 만년 인고의 시간을 가지면서 대만 8경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해안 절벽을 휘감아 돌아가는 ..

제17편 ; 용산사(대만 3)

1. 들어가며 대만 방문 첫날 중정기념당과 고궁박물원을 답사한 후 도심에 있는 용산사를 답사하였다. 불교와 도교가 공존하는 용산사(龍山寺)는 대만인들 신앙에 중심이 되는 장소로 그들의 종교관을 읽을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대만에 정착한 것은 17세기 이후로 알려져 있다.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망명객이 늘어 인구가 20만 명에 이르렀고, 1850년 경에는 250만 명까지 이주민이 증가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곡물을 생산하는 전초기지로 활성화 됨에 따라 1940년도에는 인구가 587만 명에 육박하게 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자 일제의 식민지 기간 50년을 끝내고 중국에 귀속되게 되었다. 그후 국공 내전으로 국민당 정부가 1949년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

제16편 ; 국립고궁박물원(대만 2)

1. 들어가며 본토에서 공산당 정부에 패하여 남쪽으로 이동하던 국민당 정부는 베이징의 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였던 즉, 베이징을 중심으로 왕조를 세운 송, 원, 명, 청 4개 황실의 유물들을 상하이로 옮겼다. 그러나 전황이 더욱 혼미해지자 그 유물들을 선박과 항공편으로 타이완으로 옮기면서 국민당 정부도 타이완으로 옮기게 된다. 오천 년 중국역사의 보물과 미술품 69만 점이 이곳으로 모여져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부르박물관 등과 어깨를 겨루는 세계적 박물관으로 자리잡고 있다. 어쩌면 다른 박물관은 남의 나라 유물들을 제국시대에 노략질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것이지만, 이곳 박물관의 유품들은 중국의 것을 중국인 자신들이 옮겨온 것이니 정당성이 더할 것 같다. 하기사 모택동도 장개석이 황실의 유물을 ..

제15편 ; 중정 기념당(대만 1)

1. 들어가며 새해를 맞이하여 늦깍기로 함께 공부했던 학우들과 3박 4일간의 겨울여행을 다녀왔다. 타이완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와 아주 가까운 우방국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받았던 국가였지만, 냉전시대의 종식하고 자유시장경제를 우선시하는 북방정책에 따라 우리가 소련과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로 한동안 냉랭한 관계를 가졌던 마음 아픈 나라로, 경상남북도와 제주도를 더한 면적을 가진 섬나라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전국민 2천 4백만여명 대부분은 해안가에 형성된 평지에 거주하기에 실제의 인구밀도는 대단히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오위안(桃園,도원) 국제공항의 상공에서 바라본 타이완의 첫인상은 곳곳에 유수지가 많이 분포되어 있어 무엇일까 궁금하였다. 화련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

제14편 ; 문경새재(괴산, 문경)

1, 들어가며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동무들과의 겨울여행을 다녀왔다. 지난 가을 동창모임에서 괴산에서 팬션을 운영하면서 심마니 활동을 하는 동무의 초청으로 해안가 보령에 사는 동무들이 내륙 깊숙히 위치한 괴산으로의 풍광을 즐기려 떠나는 마음은 한껏 부풀기만 하였다. 세 시간 가량 가는길에 칠갑산 장곡사에 들러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고, 괴산으로 들어서자 산세가 보령과는 완연히 다르다. 우선 동무가 운영하는 팬션에 짐을 내리고자 칠성면으로 들어서니 군자산(946.9m) 아래 계곡 소금강이 우리의 눈길을 빼앗아 버린다. 여름과 가을이라면 녹음과 단풍이 반기었겠지만, 겨울 깊숙이 들어선 지금도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맛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 전, 월악산과 조령산 사잇길 문경새..

제165편 ; 항일 애국열사 류준근의 묘역

1. 들어가며 열사의 호를 보면 우록(友鹿)으로 불리었다. '사슴의 벗'이라고나 할까? 그가 태어난 곳이 지금의 대해로 구간의 대천역에서 조금 벗어 들어간 녹문(鹿門)이라는 마을이다. 녹문은 나즈막한 환산(둘릴산)이 마을를 감싸안고, 앞에는 옥마산에서 발원한 궁촌천이 휘감아 돌아가며 넓은 벌판을 적셔주기에 옛부터 '사슴의 둥지를 품은 듯한 마을'이라고 불렸다. 마을 입구에는 청백리 류경창(淸白吏 柳慶昌)의 묘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서 있을 정도로 많은 인재들이 태어난 고을이다. 그러함에 열사도 자신의 호에 사슴을 의미하는 '록(鹿)'을 품었나보다. 대천에서 21번 국도를 따라 광천쪽으로 향하다 보면 청소사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면 나지막한 구릉으로 형성된 신송리에 들어서게 된다. 유난히 ..

제164편 ; 장현리 당집

1, 들어가며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던 외진 모퉁이 길에는 어김없이 나직한 돌담과 낮은 초가지붕의 음침하면서도 무섭기도 한 상엿집이 있어 발길을 빨리했던 추억들이 있다. 마을 어귀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새끼줄에 울긋불긋 천 조각을 끼워 둥지를 감아 돌려 신(神)이 사는 당목(堂木)임을 말해 주었다. 큰 마을에는 따로 앞산에 당집을 마련하고 산신이나 신령들을 모시고 제를 지내게 될 때면 천둥벌거숭이처럼 뛰대던 어릴적 모습이 그려진다. 당제는 농경사회에서 두레와 같은 개념으로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장치였다고 본다. 인류가 농사를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어떤 형식으로든 하늘에 농사짓기 좋은 기후를 기원하고, 자식들의 번성과 성공을 기원하며 기도할 수 있는 대상이 당집이었을 것이다. 수천..

제163편 ; 백야 김좌진 장군 추모제

1, 들어가며 음력 시월이 되면 풍성한 가을을 맞이해 각 가문마다 조상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흩어져 살던 후손들이 선산에 모여 시제를 지내는 아름다운 풍속을 이어가고 있다. 보령 땅 청소면에 위치한 백야 김좌진장군의 묘소에서도 지자체의 주최로 단체장들과 후손들,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모여 추모제를 진행하고 있는데, 김좌진 장군이 만주에서 1920년 10월 20일부터 10월 26일까지 일본군을 포위하고 혁혁하게 물리쳐 승리를 이끌었던 청산리대첩이 벌어진 시기에 맞춰 그 얼을 되새기며 매년 추모제를 진행하고 있다. 김좌진 장군은 홍성의 갈산면 출신으로 멀리 만주땅에서 아쉽게도 암살되어 산화 되었지만, 그의 부인이 힘들게 유골을 수습하여 홍성으로 옮겨 안치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후손들에 의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