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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 ; 관해정(觀海亭) (울릉3)

1, 들어가며 울릉도에는 울릉 통구미 향나무 자생지를 포함한 천연기념물 8곳과 나리분지 투막집 등 민속문화재 5곳 그리고 울릉 남서고분군을 포함한 2곳의 기념물 등 15곳의 천연기념물과 문화재가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짧은 일정에 모두를 관람하고 보고 싶었지만 울릉도의 천혜비경을 눈에 담다보니 뜻대로 되질 않는다. 저동항에 들러 관해정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버스정류장 옆에 새워진 안내판을 들여다보니 울릉도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오듯 그려진다. 울릉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싯점은 지석묘 등의 유적으로 기원전부터 살아온 것으로 추정한다. 문헌의 기록으로는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정벌이 있으며,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왜적들의 침탈로 섬주민들의 피해가 속출하자 조정에서는 섬을 완전..

제5편 ; 나리분지의 억새 투막집(울릉2)

1, 들어가며 나리분지는 성인봉(해발 984m)을 필두로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약 400m대의 평지이다. 한 개 리 단위의 마을을 형성할 수있는 자연적인 조건들이 갖춰졌다고 생각된다. 신라시대 우산국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지증왕 때(512년) 하슬라주(溟州)의 군주 이사부가 정벌하여 복속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어딘가 과장된 요소가 있었지 않나싶다. 울릉도에 들어서면 해안가 주변 모두가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사람들이 살기에는 척박한 환경임을 바로 알 수있다. 농경지를 갖고 최소한의 식량을 확보할 수있는 곳이 나리분지 뿐인데, 한 국가를 경영하기엔 턱없이 모자라 인구의 확보가 어려울 것같다. 사람이 없는 정치권력은 있을 수가 없기에 우산국이라는 나라보다는 최소한 가족단위로 한, ..

제4편 ; 나리분지의 너와 투막집(울릉1)

1, 들어가며 올 여름 7월에 오랫동안 가고 싶어했던 울릉도와 독도를 다녀왔다. 나리분지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투막집을 만나고는 젊은시절인 '80년대 강원도에서 건설현장을 누빌 때, 비행기재를 넘어가다보면 보이던 너와집이 생각났다. 그 당시 강원도 화전민 부락에는 볏집을 구할 수없기에 굴피나무 껍질을 벗겨 지붕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굴피나무 껍질도 몇 해 안가면 썩어서 비가 새기 때문에 수시로 새것으로 바꿔 끼워줘야만 했기에 장작을 패어 보관하는 장작더미 옆 추녀밑에는 굴피나무 껍질을 수시로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정선으로 가는 터널이 뚫린지도 오래이니 비행기재를 넘나드는 일도 없을터이고, 생활의 불편함에 그 너와집도 없어졌겠지만 이따금 그 집이 생각날 때가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초 왜구들..

제3편 ; 익산 쌍릉, 대왕릉(익산3)

1, 들어가며 익산이 백제의 수도로 잠시동안 운영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는 학자들마다 설왕설래의 이견들이 많다. 700여 년간 이어져온 백제의 마지막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던 의자왕은 당나라에 끌려가 패망의 설움을 안고 생을 마쳤으며, 백제가 이룩해 놓았던 문화와 역사가 송두리째 잊혀지게 된다. 백제 멸망후 기록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도 13세기 말엽에 간행 되었으니 백제 패망 후 600여년이 흐른 뒤가 되어 기록한 것이니 어찌보면 요즘 인터넷으로 떠도는 이야기보다 더 신빙성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왕조가 바뀌거나 전란을 당하면서 수 많은 기록물들이 사라진 현 싯점에서는 우리 영역에서 발생된 역사를 주변국이었던 중국과 일본이 기록한 사서들에서 우리의 역사를 구성하여야 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게 되고..

제2편 ; 왕궁리 5층석탑과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익산2)

1, 들어가며 미륵사지 석탑을 본따서 만든 석탑이라는 왕궁리 5층석탑은 1997년에 국보로 승격된 석탑이다. 백제계의 석탑 중 백미로 일켵는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과 형식은 비슷하지만 규모면에선 훨씬 웅장하게 느껴진다. 기단석 위로 5층의 탑신이 파란 하늘과 흰구름에 어울어져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던 이 지역 민중들의 신심을 기도하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후대인들은 바로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1965년에 해체 수리하면서 1층 지붕돌 중앙과 기단에서 발굴된「금강경판」19장과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등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가 발견되었다. 이들 국보급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립익산박물관으로 이전되어 백제시대의 아름다움을 후세에 전하여 주고 있다. 역시 전래되는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은 그것들이 있..

제1편 ; 미륵사지와 국립익산박물관(익산1)

1, 들어가며 미륵사지는 사적 제 150호로 백제 무왕(제위기간 ; 600~641)이 사자사를 방문할 때에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왕비의 청에 의해 절을 세웠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다. 익산의 평원에 우뚝 솟은 미륵산(해발 430.2m) 아래에 위치하는 미륵사지는 서쪽에 흉물스럽게 일제강점기 콘크리트로 보강하여 보존 했었던 탑을 다시 복원하여 단장을 하였다. 1980년대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 3탑 3금당의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확인 되었고, 2009년 1월 서쪽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미륵사와 백제 무왕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사리봉영기가 발굴되어 백제시대에 익산의 중요도가 한층 높아지고, 지역민들에게는 백제의 마지막 왕도라는 확실한 자부감을 갖게 하였다..

제160편 ; 쇳개와 해소포(蟹所浦)

1, 들어가며 대천 시가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은 성태산을 발원지로 한 대천천과 오서산을 발원치로 하는 옥계천이 합류하여 흐르는 냇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대천천의 이름이 유수지역의 지명을 따서 청라수라 불려졌음이 천휴당 이몽규의 행장비에 기록되어 있음으로 알 수 있다. 60년 대에만 해도 대천역 서쪽은 넓은 농경지가 있었으며 논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대천천을 따라 뚝방이 이어져 있었고, 그 아래로 갈대숲 사이로 바닷물이 들락날락거리고 모래를 퍼 나르던 바지선(드럼통으로 엮어서 화물을 실을 수 있도록 만든 배)들이 오가던 모습이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일제강점기가 되어 일본인들은 수심이 얕아 그때까지 이용되던 해소포구를 버리고 현재의 대천어항으로 위치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조선배가 바닥이 평편한..

고조선과 21세기(영실평원의 독사들)

지은이는 1964년생의 정읍출신으로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전 분야에 걸쳐 대중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저서로는 「1990년 한국사회 SEX라는 기호를 다루는 사람들」(새물결, 1996),「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책보세, 2012), 「어린 왕자의 가면」(책보세, 2014), 「일본, 사라지거나 해방되거나」(책보세, 2014), 「고조선 논쟁과 한국 민주주의」(글로벌콘텐즈, 2017) 등이 있다. 평상시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다방면의 책들을 무작위로 읽다보니 사학자들 마다 시각의 편차가 상당히 다르기에 보편적 일반인들에게 더욱 혼란을 주는 것이 아닌가하고 염려가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고대사를 바라보는 학자들은 고조선사의 기준을 어디에 두었느냐는 데에 관점이 판이하게 다른 대고조선론과..

독후글 2022.06.14

제159편 ; 마한의 만로국(萬盧國)

1. 들어가며 보령시청 홈페이지에서 보령의 연혁을 살펴보면 삼한시대 마한 만로국(萬盧國, 삼한의 78개 부족국가 형성기, 삼국지한전 참고)으로 부터 시작하고 있다. 보령의 북부지역은 백제 때 신촌현(新村縣), 신라 때에 신읍현(新邑縣), 고려시대에 보령현(保寧縣)으로 변환이 있었고, 남부지역은 백제 때 사포현(寺浦縣), 신라 때에 소포현(蘇浦縣), 고려시대에는 가림현(架林縣)으로 지명이 바뀌다가 두 현이 일제강점기 통합이 되어 지금의 보령시로 변경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한 만로국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궁금증으로 남아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몰랐던 마한」이라는 책을 접하면서 미약하나마 갈증을 조금 풀게 되었다. 저자는 마한(馬韓)에 대한 기록은 3세기 후엽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

《성호선생사설》과 울릉도

1. 《성호선생사설》 천지문(天地門) 3 「울릉도」 안용복이라는 자는 동래부의 전선(戰船) 노군(櫓軍, 노 젓는 일을 하는 군사)인데, 왜관에 출입해 왜말을 잘했다. 우리 숙종 19년(1693)인 계유년 여름에 울릉도에 표류를 했는데, 일본 배 7척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때 얼마후 왜인들이 섬을 다투는 논쟁을 일으키자 안용복이 왜인과 더불어 논쟁하며 따졌고, 왜인들이 노하여 잡아가지고 돌아가서 오랑도(五浪島)에 가두었다. 안용복이 그 오랑도주에게 "울릉(鬱陵), 우산(芋山)은 본래 조선에 속했습니다. 조선은 가깝고 왜는 먼데 어떤 이유로 나를 가두어 잡아두고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도주가 그를 백기주(伯耆州)로 보냈다. 백기도주가 빈례(賓禮)로써 대우하며 은을 주었지만 번번히 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