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6편 ; 관해정(觀海亭) (울릉3)

푸른나귀 2022. 10. 3. 13:04

1, 들어가며

 

   울릉도에는 울릉 통구미 향나무 자생지를 포함한 천연기념물 8곳과 나리분지 투막집 등 민속문화재 5곳 그리고 울릉 남서고분군을 포함한 2곳의 기념물 등 15곳의 천연기념물과 문화재가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짧은 일정에 모두를 관람하고 보고 싶었지만 울릉도의 천혜비경을 눈에 담다보니 뜻대로 되질 않는다. 저동항에 들러 관해정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버스정류장 옆에 새워진 안내판을 들여다보니 울릉도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오듯 그려진다.

 

  울릉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싯점은 지석묘 등의 유적으로 기원전부터 살아온 것으로 추정한다. 문헌의 기록으로는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정벌이 있으며,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왜적들의 침탈로 섬주민들의 피해가 속출하자 조정에서는 섬을 완전하게 비우는 공도정책(1379년(우왕15), 1417년(태종17))을 실시한다. 

 성호사설에 의하면 안용복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693년과 1696년 두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에 침범하는 데 항의하고 담판을 짓고 돌아온다. 조정에서는 아쉽게도 그 행적에 중벌을 취하는 태도를 가진다.

  1882년(고종19)에서야 공도정책을 포기하게 되고 1883년에 주민이주(16호 54명)가 시작되었으니 500년 동안 국가의 주권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관해정은 주민이주가 시작되었던 개척시대의 이주민 상황과 애환을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터이기에 민속문화재 못지 않는 울릉도 근대사의 장이라 할 수 있겠다.

 울릉도민의 휴식처로, 방문객들이 울릉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역사의 장으로 많은 역활을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나라 동쪽을 지키는 울릉도에 공항이 생기고, 서쪽땅을 지키는 백령도에 공항이 생긴다면 수 백년 동안 터버림을 받았던 주권을 크게 확장시키는 역활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2. 참고자료

 

  ● 위치 ;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328-1

 

   @ 관해정(觀海亭)의 유래

      이곳은 저동 앞바다의 촛대바위 뒤로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기 좋은 곳이라 하여 관해정이라 부르며, 개척당시 관해정 부근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후박나무 숲이었으나 개척민들이 나무를 베어내고 논밭을 만들어 점차 울창했던 숲은 사라지고 현재의 몇 그루의 후박나무(수령 350년 정도)들만 보존되어 마을내 유일한 숲으로 남아 주민들에게 좋은 휴식처와 아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어 왔다. 또한 개척 당시부터 마을 산신당이 1960년경까지 있다가 이후 울릉고등학교 뒤편으로 이전 되었지만 현재에도 일명 이곳을 제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1882년 조선정부에서는 빈섬으로 관리해 오던 울릉도를 사람이 거주할 수 있도록 개척령이 반포되자 울진에서 정감록을 신봉한 전재환(全在桓) 일가가 피난지라는 이유로 울릉도로 이민해 올 때 식솔로 함께 이주해 온 배상삼(裵祥三)은 힘이 천하장사인 무부(武夫)였다. 그는 사동의 과부를 보쌈하여 관해정 앞에서 대장간을 차려놓고 농기구를 만들어 팔며 거주하였다. 당시에 울릉첨사로 순시차 입도한 평해군수 조종성(趙鐘成)은 배상삼을 도수(島首)로 정하여 섬을 관리토록 하였는데 배도수는 왜인들이 무단으로 건너와 벌목하는 것을 혼자의 힘으로 20여명을 상대하여 몰아낸 이후로 왜인들이 몇 년간 얼씬도 못하였다.

  1894년경 가뭄과 쥐떼로 흉년이 들어 개척민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부유층의 창고를 강제로 수색하여 수십석의 곡물을 모아 나누어주어 굶어 죽어가는 수 백명을 살려 생명의 은인이 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이 때에 왜인들로부터 생필품을 구입해서 개척민들에게 되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몇몇 상인들이 배도수로 인하여 왜인들이 오지 못하자 상업을 할 수 없어 그를 죽이기로 모함하였고, 배도수는 태하성하신당제를 지낼 때 이들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이곳 관해정 앞에서 화장장으로 치러졌다.

  1962년 10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및 대통령권한대행인 박정희대통령이 군함을 타고 울릉도를 방문하였는데 저동항내까지 군함이 들어올 수 없어 고생하는 주민들의 고충을 직접 체험하고 저동항 방파제를 건설할 것을 지시하였고 다음해인 1963년 9월에 울릉도민들은 이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모금을 하여 박정희 대통령 순찰기념비를 항만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세웠다. 저동항은 1980년도에 준공되었고 당시 동해안에서 두 번째로 큰 방파제로써 동해의 어업전진기지가 되었다.

  관해정은 저동마을의 정월 대보름, 팔월 한가위 등 문화행사의 공간으로 이용되었고, 50년대와 60년대에는 남면 그네뛰기 대회도 매년 열리던 곳으로 마을내 행사가 있으면 의례히 이곳으로 모이는 장소로 주민들의 가장 사랑받는 곳이었다. 관해정을 중심으로 큰모시개, 중간 모시개, 작은 모시개 마을로 나뉘어져 있으며, 참고로 저동마을은 개척 당시 이곳 해변에 모시가 많이 자생해 있었기 때문에 모시가 많은 포구란 뜻으로 모시개라 하였다. 이후 행정동명을 제정할 때 '모시 저(苧)'자를 써서 저동이라 하여 현재까지 이르고있다. 그리고 깍기등, 주사골(朱沙谷), 줄맨등, 숯골, 내수전(內水田),신흥동, 와달리(臥達里), 용바위골 등 자연지명을 가진 마을이 산재해 있으며, 주변에는 촛대바위와 북저바위, 대섬(竹島), 봉래폭포, 풍혈(바람구멍), 해안산책로, 내수전약수터, 일출전망대와 개척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내수전 둘레길이 있다. ≪ 현장 안내판 발췌≫ 

 

   @ 성호선생사설》 천지문(天地門) 3 「울릉도」

   안용복이라는 자는 동래부의 전선(戰船) 노군(櫓軍, 노 젓는 일을 하는 군사)인데, 왜관에 출입해 왜말을 잘했다. 우리 숙종 19년(1693)인 계유년 여름에 울릉도에 표류를 했는데, 일본 배 7척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때 얼마후 왜인들이 섬을 다투는 논쟁을 일으키자 안용복이 왜인과 더불어 논쟁하며 따졌고, 왜인들이 노하여 잡아가지고 돌아가서 오랑도(五浪島)에 가두었다. 안용복이 그 오랑도주에게 "울릉(鬱陵), 우산(芋山)은 본래 조선에 속했습니다. 조선은 가깝고 왜는 먼데 어떤 이유로 나를 가두어 잡아두고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도주가 그를 백기주(伯耆州)로 보냈다. 백기도주가 빈례(賓禮)로써 대우하며 은을 주었지만 번번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백기도주가 "당신은 어떻게 하고자 합니까?" 라고 물었다. 안용복이 또 그 연고를 말하며 이르기를 " 침범해 어지럽게 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교린 관계를 두텁게 하기 위해서이고,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백기도주가 그것을 허락해 강호(江戶, 에도막부)에 보고했고, 문서를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드디어 돌아가게 되었다. 돌아올 때 장기도(長碕島, 나가사키)에 이르렀는데, 장기도주가 마도와 작당해 그 문서를 뺏고, 그를 마도에 보냈다. 마도주가 그를 가두고 강호에 보고했더니, 강호가 다시 외교문서를 만들어 두 섬을 침범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또 호위해 보내도록 명했다. 마도주가 다시 그 문서를 뺏고 50일 동안 가두었다가 동래 왜관으로 보냈고, 또 40일 동안 억류했다가 그를 동래부로 보냈다. 안용복은 그런 사실을 동래부사에게 다 고했지만,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범월(犯越)의 죄로써 그에게 2년의 형벌을 내렸다.

 

   을해년(1695) 여름 안용복이 울분을 삭이지 못해 떠돌이 중 5명과 뱃사공 4명을 꾀어 울릉도에 다시 갔는데, 우리나라 상선(商船) 세 척이 먼저 정박하며 고기를 잡고 대나무를 베고 있었다. 마침 울릉도에 온 왜선이 있었는데, 안용복이 여러 사람에게 포박해 잡으라고 했지만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따르지 않았다. 왜인이 이르기를 "우리들은 송도(松島)에서 고기를 잡다 우연히 이곳에 왔으니 곧 가겠다."하니, 안용복이 말하기를 "송도는 본래 우리나라 우산도(芋山島)이다."라고 했다. 다음 날 우산도로 쫒아가니 왜인은 돛을 올려 달아났고, 안용복이 그들을 추격해 옥기도(玉岐島)에 표류했다가 다시 백기주(伯耆州)에 이르렀다. 백기도주가 환영하니 안용복이 울릉수포장(鬱陵搜捕將)이라 자칭하며 가마를 타고 들어가 도주와 더불어 대등한 예로 대하며 전후의 사정을 매우 자세히 말하였다.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반드시 쌀 1석에 15말, 면포 1필에 35척, 종이 1권에 20장을 보내는데, 마도(馬島, 대마도)가 훔처 줄이고 쌀 1석은 7말, 포 1필은 20척, 종이를 잘라 3권으로 만들었다고 이릅니다. 내가 직접 관백에게 가서 속인 죄를 다스리려 합니다."라고 했다. 동행 중에 문자를 잘하는 자가 있어 소장을 만들어 도주에게 보여주었다. 마도주(馬島主)의 아버지가 그것을 듣고 백기주에서 용서를 구하였고, 이 일이 드디어 해결되었다. 위로해 돌려 보내며 말하기를 "땅을 다투던 일은 모두 당신의 말과 같이 하겠습니다. 이 약속과 같이 하지 않는 자는 마땅히 중벌에 처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가을 팔월에 양양에 돌아와 정박하니 방백(方伯, 관찰사)이 장계를 올려 보고하고, 안용복 등을 한양으로 압송했다.(우산도는 왜 독도인가, 이기봉, 소수출판사, 2007, 151~154쪽)

 

 

 

   @ 관해정 후박나무 숲 전경

   @ 관해정 내 한켠에 세워진 박정희순찰 기공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