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8편 ; 고달사지 1 (여주1)

푸른나귀 2022. 10. 4. 18:38

1, 들어가며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고려시대에 들어와 선종사찰로 국가가 관장하는 대사찰로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곳이란다. 창건 당시의 사찰은 광대하여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이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절 부근에는 큰 마을이 형성 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고 한다.  원종대사가 869년에 태어나서 958년에 90세에 입적하였다. 성주사의 무염대사(801~888)처럼 오랫동안 불가에 있었으니 고승의 위치에 있었고, 제자들도 많았을 것이라고 하겠다.

 

 넓게 자리잡은 고달사지 초원에 들어서니 말 구유를 닮은 석조가 길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요즘의 욕조보다 크기가 제법 크다. 이곳에 쌀을 씻는다면 주변의 냇가엔 쌀뜨물로 하얗게 한참이나 흘러갈 것 같다. 당시의 가람의 규모를 말해주는 듯하고 모서리 부분을 둥글게 말아 깍아냄으로써 부드러운 맛을 느끼게 한다. 하부 측면에 배수구를 만들어 씻기 편하도록 한 편리성도 도모한 것 같다.

 석조 좌대는 금당 안의 불좌로 정교하게 잘 다듬어져 상태가 매우 양호한 것 같다. 구름과 연꽃 문양이 대칭적으로 배치하여 비록 불상은 없어졌지만, 그 위에 있었던 불상까지 그려지는 듯 수려하다.

 탑비는 큰스님이 입적하면 그의 행적을 찬하는 비를 말하고, 승탑은 그의 사리를 봉하는 묘를 말하는데, 원종대사는 탑비와 승탑을 함께 남기고 있다. 원종대사 탑비는 아쉽게도 귀부와 이수 부분만이 현장에 있고, 비신 부분은 일제강점기에 무너져 조각이 나는 바람에 여주박물관에 소장하고 복제품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고달사지를 돌아보면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고려시대의 대사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불탑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신라 말기에 세워진 보령의 백월보광낭혜화상비보다는 후대에 세워진 탑비이지만 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귀부와 이수를 좀더 확인하여 보니 '보령 수부리의 귀부와 이수'와 흡사하다. 귀부의 머리부분 툭 불거져 나온 눈과 뿔의 형태가 거의 흡사하고 이수 부분의 이문(螭吻)의 형상도 비슷하다. 더군다나 비신의 두께 마져도 성주사지 탑보다도 얇은 것이 수부리 탑비와도 흡사함을 느끼게 한다.

 수부리의 탑비가 발굴 된다면 아마도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이 탑비를 볼 때에 동시대의 작품일 것이라 생각이 든다. 

 

2, 참고자료

 

    ● 고달사지 위치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20-3 일원

 

    @ 여주 고달사지 석조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247호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두거나 곡물을 씻을 때 사용하던 용기로 원형, 팔각형, 직사각형 등의 다양한 형태로 만들지만, 직사각 형태가 가장 많다. 건물 안, 절의 우물가나 취사장 가까이에 두기도 하고, 중심 공간으로 진입하는 곳에 두고 부처님 앞에 나갈 때 손을 씻거나 입을 헹궈 몸을 청결이 하는 용도로도 쓰였다.

 여러 절터에서 발견된 석조는 그 크기나 위치가 제각각이지만, 이 석조처럼 건물터 안에서 발견된 예는 드물다. 건물터 안은 구들 및 수조가 놓인 방, 물품을 보관하는 광 등 각기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던 방으로 구성된 생활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수한 돌 다듬기 기법과 장식 기법이 돋보이는 예술성이 뛰어난 석조이며, 석조를 통해 옛 고달사의 내력이나 위상을 알 수 있다.

 

  @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 보물 제 8호

          대좌는 부처나 보살이 앉는 자리로,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는 불상이 놓여 있지는 않지만 보존 상태가 좋다. 고달사는 764년(경덕왕23)에 지어진 절로 전해지나, 누가 지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받침돌의 위, 중간, 아래의 삼단으로 되어 있고, 각기 다른 돌을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했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 받침돌과 위 받침돌에는 연꽃잎이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기법은 고달지 승탑(국보제4호)의 아래 받침돌과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 나가는 모양으로 꽃잎을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 석조 미술에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절터에 있는 고달사지 승탑이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각 솜씨가 훌륭한 대표적인 사각 대좌이다.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보물 제 6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는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 찬유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난 원종대사가 958년(광종9)에 90세로 입적하자 광종은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하였다.

 이 탑은 받침돌과 비 몸, 머릿돌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15년 비 몸체가 넘어지면서 여덟 조각으로 깨어지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해 오다가 지금은 여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고달사터에는 2014년 복제한 비 몸이 설치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 출생, 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와 입적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광종26)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거북 머리가 험상궂은 용머리에 가까우며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 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 장식이 복잡한 점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이어지는 탑비 형식을 잘 보여준다. ≪현장 안내판 참조≫ 

 

 

   @ 고달사지 석조는 직사각형으로 구유와 같이 둥그스름하게 파내었으며 하단 풀난 곳으로 배수구멍이 설치되어 있다.

    @ 석조대좌는 구름무늬와 안와무늬, 연꽃잎 무늬를 대칭적으로 배치 조각하여 안정감을 확보한다.

   @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 전면 전경

     @ 원종대사의 탑비 후편 전경

    @ 탑비의 귀부(비희(贔屭))는 금방이라도 앞으로 기어나갈 듯 발톱에 힘이 있고, 부라린 두 눈은 악의 범접을 금하고 콧구멍으로 날숨을 내 밷을 것 같은 위용을 갖춘다.     

    @ 앞 발 뒤로 조각된 무늬가 파도문양 같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거북껍질에 파도문양을 선각하는데 색다르다.

     @ 등껍질을 표현한 육각문양과 꼬리의 말림이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 이수 부분이 일부 파손된 듯하지만 안상(코끼리 눈)위로 이문(螭吻)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서로 몸체를 꼬아 위엄과 생동감을 갖게한다.

   @ 탑비의 후편 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