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9편 ; 고달사지 2 (여주2)

푸른나귀 2022. 10. 4. 20:00

1, 들어가며

 

     문화재 지정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들이 있어왔다. 논쟁의 종류로는 숭례문의 국보 1호로서의 상징성 결여, 문화재 지정 번호 부여로 인한 서열화, 문화재 지정번호 폐지 시행의 미흡, 국보와 보물의 지정기준의 모호함 등이 지적된다.

 사전적 의미에서 국보는 '나라의 보배로, 법률에 의해 정해진 중요한 문화재' 이고, 보물은 '매우 드물고 귀하여 가치가 있어 보배로운 물건, 또는 국보 다음으로 중요한 유형 문화재'라고 명시되어 있다. 

 문화재 보호법 시행령 제 23조에 따르면, '1)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을 보물로 정할 수 있다. 2) 문화재청장은 제1항의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보로 지정할 수 있다. 3) 제1항과 제2항에 따른 보물과 국보의 지정기준과 절차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고달사지에는 부도라고 불리기도 하는 승탑이 두 곳에 있다. 국보 제4호로 지정된 승탑과 보물 제7호로 지정된 원종대사의 승탑이 그것이다. 규모와 형상으로는 비슷하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는 국보와 보물의 차잇점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대체로 문화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시기가 오래된 것, 특별하게 예술적 가치가 큰 것, 제작자와 사용자의 이력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 등의 판단 기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종대사 승탑은 탑비와 함께 전해지기에 설립 시기가 신라 말엽이고, 누구의 승탑인지 증명되며 원종대사의 행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승탑은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어느 고승의 승탑인지 탑비가 전해지지 않기에 확인할 바가 없다. 그렇다면 원종대사의 승탑 보다 무명의 승탑이 국보로 지정될 수 있었던 근거가 더 예술성이 뛰어나서일까?

 

  원종대사 승탑은 신라 말기의 부도 모양으로 대석부(臺石部)가 비교적 큰 것으로 팔각당형식(八角堂形式)으로 분류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부도이다. 

 승탑 두 기가 한 곳에 모여있어 헛된 상념에 얹어본다.

 국보나 보물 모두가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어느것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 보다는 모두가 중요하다는 의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일반인들을 위해 원종대사 승탑과 무명의 승탑의 문화재 가치의 차잇점을 안내판에 설명을 덧붙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2, 참고자료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승탑 위치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2-1

                                      지정 ; 보물 제 7호

     ● 여주 고달사지 승탑 위치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

                              지정 ; 국보 제 4호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은 원종대사의 승탑으로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원종대사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이 탑은 삼단으로 이루어진 받침돌 위에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팔각 평면 형태를 기본으로 하지만 받침돌의 구조가 특이하다.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을 돌려 새겨 받침돌을 만들었다. 아래 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 받침돌 윗부분부터 팔각 평면으로 되어 있다. 윗부분에는 한 줄로 팔각 띠를 두르고, 밑부분에는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했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용 네마리가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위의 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 몸통의 네 면에는 문짝 모양이, 다른 네 면에는 사천왕 입상이 새겨져 있다. 지붕 처마는 수평이지만 귀퉁이 부분이 위로 향해 있고 꽃 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한 머리 장식이 있다.

 이 승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 찬유는 869년(경문왕9)에 태어나 958년(광종9)에 입적한 고승이다. 승탑이 세워진 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따르면 977년(광종2)으로 추정된다.

 

   @ 여주 고달사지 승탑 ;

          여주 고달사지 승탑은 고달사지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승탑이다. 고달사는 764년(경덕왕23)에 지어진 절로 전해지며,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의 면모를 유지하기도하였으나, 전하는 기록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에 폐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탑은 바닥 형태가 팔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 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승탑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돌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가운데 돌에는 거북 한 마리가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거북의 좌우에는 모두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넣었다.

 사리를 모셔 둔 탑 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모서리의 끝부분마다 큼직한 꽃 조각이 달려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모양의 보개(寶蓋)가 올려져 있다.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 조각 양식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에서 고려 특유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무렵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을 다듬은 솜씨가 세련된 우수한 작품이다.≪현장 안내판 발췌≫  

 

    @ 고달사지 원종대사 승탑 

 

    @ 고달사지 승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