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64편 ; 장현리 당집

푸른나귀 2022. 10. 30. 17:03

1, 들어가며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던 외진 모퉁이 길에는 어김없이 나직한 돌담과 낮은 초가지붕의 음침하면서도 무섭기도 한 상엿집이 있어 발길을 빨리했던 추억들이 있다.  마을 어귀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새끼줄에 울긋불긋 천 조각을 끼워 둥지를 감아 돌려 신(神)이 사는 당목(堂木)임을 말해 주었다. 큰 마을에는 따로 앞산에 당집을 마련하고 산신이나 신령들을 모시고 제를 지내게 될 때면 천둥벌거숭이처럼 뛰대던 어릴적 모습이 그려진다.

 당제는 농경사회에서 두레와 같은 개념으로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장치였다고 본다. 인류가 농사를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어떤 형식으로든 하늘에 농사짓기 좋은 기후를 기원하고, 자식들의 번성과 성공을 기원하며 기도할 수 있는 대상이 당집이었을 것이다.

 수천년을 이어온 그 관습이 일제강점기에 미신으로 치부되어 배격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마음속에 전통적인 풍속을 지속적으로 지켜 왔다. 하지만 70년대 전후반, 농경사회에서 산업화시대로 접어들며 도시로의 이주가 극대화 되면서 농촌인구가 줄어들고, 새마을 운동으로 인한 미신타파가 당집과 상엿집 같은 대상으로 옮기게 되자 전통으로부터 멀어져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즉 수천년을 이어온 전통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보령에 내려와 상엿집과 당집을 찾아보기 위해 여러 마을을 돌아보았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침 장현리에 당집이 그나마 형체는 남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 번에 걸쳐 숲속을 헤쳐 보았는데, 잡목이 우거져 찾을 수가 없었다. 잡목의 나뭇잎이 어느정도 떨어진 가을녘에 다시 찾아 동네 아주머니에게 여쭤보니 소나무숲에 있을거라고 알려주며 그곳을 가본지가 하도 오래되어 아마 없어졌을거란 뒷말을 잇는다.  건너편 소나무 숲으로 들어서 좁은 산길을 타며 좌우로 훓터보니 집의 형체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한참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찾아 보았는데 가시덤불 사이로 낮은 지붕의 모습이 어렴풋 보인다.

 불과 한두어해 전의 당집은 기둥과 출입문, 함석지붕의 형체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가까히 가보니 폭삭 주저앉은 모습이다. 이곳에서 매년 제향을 받던 산신은 어디로 떠난 것일까?  이곳에 와서 두손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며 기원을 빌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어디로 떠난 것일까?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스석거리는 나뭇잎이 그 답을 대신한다.

 

 무너진 당집의 형체를 훓터보니 사방 한 칸집으로 벽체의 하부는 돌과 흙으로 조성하고 상부는 수숫대를 엮어 흙을 발라 상부벽을 조성하였다. 지붕은 원래 초가였을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엔젠가 함석지붕으로 대체한 것 같다. 내부의 상태는 붕괴로 인하여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대체로 아래의 참고자료 내용과 같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집은 남서쪽을 향해 한단 낮추워 제를 지낼 수 있는 넓은 부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아마 이곳에서 제를 지내면서 농악대의 풍물이 신명나게 어울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90년대까지 당제를 지냈다고 하니 장현리 주민들은 제법 늦게까지도 전통을 고수하였다고 본다.

 때마침 아랫동네에서는 은행나무 축제가 한창이라 노랫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이곳까지 왕왕거린다. 동네 냇가를 따라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고 많은 관광객들이 가을 경치에 만끽을 한다. 깡통열차를 타고 소리지르며 즐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당집까지 들리는 듯하다.

 축제가 8년차인가를 성공적으로 하였다는데, 당집의 당제를 연관하여 꾸며볼 생각을 안하였는지 궁금하다.

 은행마을 축제기간이 음력 10월 초순경이니 당집을 복원하고 당제를 지낸다면, 볼거리가 많아지고 마을주민들의 화합에도 효과가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굳이 당제가 신앙으로 배격대상이 아니라 축제의 개념으로 의식을 전환하여 전통적인 문화유산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2, 참고자료

 

          ●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산 30-1

 

       @ 장현리 당살미 바로 위 당산에는 당집이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하여도 장현1리 사람들이 음력 초 3일에 당집에 모여 산제를 지내고, 풍물패가 산신의 가호를 받아 각 집을 돌며 지덕을 눌러주기도 하였다. 당제는 안동김씨와 평산신씨가 장전마을에 정착하면서부터 지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축문책에는 당기를 표시하였다고 하나 전하는 바는 없다. 마지막 산제는 김승진씨가 주도하였지만 그의 사후에는 더 이상 지내지 못했다고 한다.

 당집은 당산이라고 부르는 마을 뒷산의 중간 언덕에 있다. 사방 1칸의 흙집이다. 덤벙주초에 4개의 방형의 나무기둥을 세우고 2m 높이에 지붕을 만들었다. 남쪽 벽 가운데엔 외짝의 여닫이 문이 있고 문 옆엔 나무판자로 길게 벽체를 대신했다. 나머지 3면은 둥그런 돌과 흙으로 50cm 정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수숫대에 흙을 발라 벽체를 만들어 벽을 만들었다. 지붕은 4모로 함석이다. 지붕에서 1자 정도 띄어 벽을 만들고 안에 채광이 들도록 하였다. 당집 안에는 일정한 높이에 선반을 달아 산신을 모셨다고 한다.

 당집의 서쪽 삼거리와 잿말 사이에 통샘이 있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당제에 사용하는 물은 모두 통샘의 물로 지냈다. 또한 당제를 지낼 때는 당제 전에 샘을 품고 뚜껑을 덮어 놓았으며, 반드시 이 물을 길어다 목욕 재개하고 제물을 만드는 데도 이 물을 사용하였다.

 당집 주변은 신성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당산의 나무를 홰손하거나 당산에서는 일체 말다툼 등 싸우거나 부정한 일을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섣달이 되면 그믐께 마을 원로들이 모여 당주와 부당주를 뽑고, 축관, 소지관을 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산제 지내기를 원하지 않는 집은 미리 불참의사를 밝히기도 하였는데 대략 70% 정도가 참여 하였다고 한다.

 당주는 제를 주관하는 사람으로 행실과 언행을 조심하여 당제가 임박하면 누구를 만나거나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는 한동안 부부 생활도 금하고 불살생 등 부정의 방지에 애썼다. 매일 목욕재계하고 제에 쓸 제수를 정성스럽게 준비 하였다. 제수는 통샘의 맑은 물, 백무리, 돼지머리, 오곡 등을 전설 하였다. 제의 비용은 걸립을 통해서 충당했다. 풍물을 치고 마을을 돌면서 걸립을 했고 마을 사람들은 첫방아를 찧은 쌀을 따로 보관 하였다가 내놓기도 하였다. (보령 장현리, 신재완, 보령문화원, 2021, 38~39쪽 발췌)

      

     @ 당집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예나 지금이나 단풍이 손님을 맞이할 것 같다.

    @ 숲길에서 약간 떨어진 잡목 사이로 주저앉은 당집의 모습이 보인다.

    @ 벽체는 붕괴되고 함석지붕이 바닥에 기대어져 녹이 슬어가고 있다. 

    @ 이곳에 거주하던 마을의 신(神)은 어디로 떠난 것일까?

    @ 돌과 흙으로 벽을 쌓았던 벽체는 풍우에 무너지고 기둥으로 쓰였던 나무도 지친 세월에 누워 있는 듯하다. 

    @ 수 천년을 이어왔던 마을의 풍습이 근래에 와서 미신타파라는 명목으로 문화의 단절됨을 아쉬워 한다.

    @ 이제는 누가 와서 빌어줄 사람도, 눈길을 줄 사람도 없어 당신(堂神) 또한 바람과 함께 떠난 듯...

   @ 아랫마을에서는 은행나무 축제로 노랫소리와 관광객들로 북적임이 당집과 대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