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62편 ; 독립지사 동양자 김광제(東養子 金光濟)

푸른나귀 2022. 10. 18. 16:47

1, 들어가며

 

   동대 사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가로변 공원에 서 있는 황동색 동상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에 들어온다.

 일제 강점기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서 진행 하였고, 대구 등의 경상도 지역에서 민족계몽운동을 추진하며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전념을 다하여 일생을 바친 우리고장 웅천 평리 출신의 독립지사 동양자(東洋子) 김광제(金光濟) 선생을 기념하는 동상이다. 우리 지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보령에서의 활동이 미약해서인지 지역민들은 김광제 선생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지, 시민들은 무심하게 동상 앞을 스쳐 지나간다. 

 김광제는 부친 김상하(金商夏), 모친 풍천임씨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명은 홍제(弘濟), 호는 동양자(東洋子), 시호는 석람(石藍), 자는 덕재(德在)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17대조인 우제공 한(愚濟公 漢)이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남포 평리로 낙향하여 정착한 재지사족이다. 

 

 삼희당 윤석봉(尹錫鳳)의 제자로서 유학을 전수받아 존왕의식이 강한 인물이 되었고, 척사정신과 의리정신은 삼희당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입문하면서 주로 경상도 지역에 근무를 하게 되었고, 동래경무관을 끝으로 재야 지식인의 활동가로 당시 대구지역의 갑부 서상돈(徐相燉)과의 인연이 이어져 교육활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대구광문사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저술 발간과 신학문의 도입하여 국민들의 자강의식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출판사를 경영하게 된 것이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은 노동자, 농민, 부녀자들로부터 상인, 군인, 기생, 학생, 승려 등에 이르기까지 전국민이 호응을 받게 되고, 민족운동의 동참이라는 의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민의 한민족과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이 커지자 크게 당황한 일제는 이 운동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대한매일신보사 안에 설치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총무 양기탁(梁起鐸)을 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국채보상운동의 승기를 꺽어놓게 된다.

 이로인해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방해 속에 빛을 발하지 못하였지만, 전국 각계각층의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이라는 대명제를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의 경제 침략에 번민하고, 경상도 지역의 계몽운동을 주도하며, 국채보상운동을 추진하였으며, 그 후에 명연설가로 활동하고, 마산지역의 문예활동을 주도하고, 조선노동대회의 단장으로 추대되어 활동 하였다.

 1900년(35세)에 동래경무관으로 임명되면서 경상도와 인연을 맺게 되고, 1920년(55세) 조선노동당대회 단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중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해 타향에서 외롭게 묻히게 된다. 1927년 11월 후손들과 지역 유지들이 지사의 유해이장을 위해 모금을 하였고, 고향땅 평리 양촌에 이장, 안치하였다. (김광제, 자립경제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꿈꾸다. 김형목, 전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보령문화원 목요강좌 참조)

 

  은행나무의 노란 이파리가 지사의 동상 아래로 흩뿌려진다.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지도 못하는 작은 장난감 인형처럼 황금색 동상의 눈길은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하다.

 일제강점기 그 혼란스럽고 망국으로 이끌던 친일의 세력에 항거하며 고민하던 지식인들을 기억하는 것도 지금 세대에 일어나는 또 다른 혼란스러움을 타개하는 표석이 될 수도 있다.  

 

 

2, 참고자료

 

          ● 김광제 동상 공원 ; 충남 보령시 동대동 1950 (동대 사거리)

             동양자 김광제 묘소 ; 충남 보령시 웅천읍 평리 122-1

 

        @ 독립지사 동양자(東洋子) 김광제(金光濟) 사적(史跡)

           지사는 1866년 7월 1일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에서 태어났다.

  1888년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효력부위용양위부사용에 제수되고 선략장군용양위부사과, 통훈대부훈령원첨정, 정삼품통정대부비서원승, 호남시찰사, 동래경무관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체결하고 침략을 노골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배일 및 내정부패 탄핵상소를 올렸다. 친일파 척결의 무고로 고군산도에 유배된 지 4개월여 후인 1906년 1월 대구로 내려가 광문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하여 각종 국민 계몽도서를 발간하는 등 교육과 민족 자강의식고취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생은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 문회 특별회의에서 「 국채보상운동발기회 연설문」을 작성하여 낭독함으로써 대구의 거상 서상돈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하였다. 아울러 지사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교남교육회 등 학회에 참여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위한 강연활동에 전년하였고, 또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설립한 경북낙육재와 양사재의 보통학교 교장, 달명의숙 부교장을 역임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지사는 마산에서  마산문예구락부」를 발간하는 등 출판문예 활동을 계속해 후일 마산 근대문학의 효시」로 평가 받고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각종 사회운동이 고조되자 자사는 "한, 청, 일 친애만이 동양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동양평화」사상을 설파했으며, 1920년에는 제2의 3.1운동 거사를 추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고,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조선노동단을 결성하여 조선노동대회 회장, 경성본부장으로써 강연, 전국에 지부를 설립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전개 하다가 동년 7월 24일(음, 6월 9일) 저녁식사에 초대된 후 급작스런 복통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2015년 6월 9일 기념사업회에서는 지사의 순국 95주기를 맞이하여 모금활동을 통해 보령시 동대동 중심지에 지사의 동상공원을 조성했다. ( 김광제 선생 묘역 안내판 발췌)

 

         @ 국채보상운동 발기 연설문

            오늘 문제는 국채보상으로, 본사에서 발기하니, 본사의 형편부터 대강 설명하겠습니다. 본사를 광문사라 칭하고 설립하던 초기의 일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보고 듣고 알고 있듯이, 본사의 주장 요지는 도내(경상도)의 각 군에 교육을 확장하고 사회를 발전하게 하는 것이로되, 가까운 군의 모모 등 제씨가 이단으로 지목하고 또 그 사이에서 협잡이 있었는데, 쉬이 3년이 지나자 각 군에서 학교를 세우고 학문을 일으킴을 보고, 이곳 인근의 각지에서도 점차 이 일을 일으켜서 다시 믿음을 주니, 이번에 발기하는 것에도 임심할 나위 없이 나라를 위하는 큰 일임에 다른 뜻이 없는 것으로 생각 하신다면, 정성을 다하여 진술할 것입니다. 무릇 국가에 백성이 없으면 국가가 아니요 백성에게 나라가 없으면 백성이 아니니, 국가가 가는 길에 명암을 보면 진실로 백성이 의무를 실천하느냐 실천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백성이 된 자는 국가와 가정이 둘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작게는 가정이고 크게는 국가이니, 국가에 병이 든 것이 곧 내게 병이 든 것이고, 국가에 환란이 있는 것이 곧 내 가정에 환란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실상 국민의 정당한 의무요 책임이니 국가의 일을 다방면으로 생각하지 않고는 일을 진행할 수 없고, 일을 진행함이 없으면 국민이라 자처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대한의 현상이 근심되고 염려할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니, 제일로 패망할 것과 시급한 것은 일천 삼백만원의 국채입니다. 이 국채의 원인은 소위 정부 당국자가 잘 조치하지 못한 잘못이니, 그 마지막에 추악하게 나타난 결과입니다. 이에 최선의 방법은 국민이 하나가 되는 것이니, 이런 뒤에 과실이 있고 없고는 논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후회가 막급임니다. 한 달, 한 해에이자가 불어남은 물과 같고, 세월이 흘러서 불어난 채무가 산처럼 많아지면 채권자의 빚 독촉은 날로 거세지고, 채무자의 빚 갚음을 길이 없을 경우에는 재판소 법률에 붙여 집행 외에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집행할 경우에는 채무자 소유의 어떤 물건이든지 모두 해당합니다. 오호! 통탄할 일로 본인은 차마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 바 입니다. 말하자면 토지는 토지이고 인민은 인민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뒤의 참상은 여러분도 응당 헤아릴 것이 국가의 채무를 그대로 두고는 토지가 나의 소유가 아니며 인민도 우리의 인민이 아니니, 보상하기로 합시다. 우리 인민의 뼈와 피를 뽑아서라도 보상합시다. 아비의 채무가 있다면 어찌 아들이 모른다고 하며 국가가 채무가 있다면 백성이 어찌 모른다고 합니까! 지금 우리 가난한 백성들의 정세로서 일천삼백만원이라는 거액의 부채를 갚는다면 언론이 터무니없다 할 것이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첫 번째 방책을 내는 것이니 이를 심사숙고 하십시오. 우리 대한 이천만 동포가 매월 소비하는 것 중 가장 작고 소비하지 않아도 또한 무방한 것이 매일 흡연하는 연초입니다. 궐련을 엽초로 피운다고 생각하고 계산해 보면 매인이 하루 소비하는 돈은 3전 가량이 되니, 2천만이 매일 소비하는 것을 3개월 90일로 계산할 때 3개월 동안 흡연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민이 죽을 리 없지만, 이 채권을 갚지 않고서는 국가나 인민이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오늘부터 담배를 끊고 국채보상을 결정해서 전국의 인미들에게 권고합시다. 만약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천하의 미친 짓이라 불릴 것이니, 발기자는 본사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으로 자서할 것이고, 본인부터 흡연하는 모든 기구를 만장에 계신 여러분 앞에서 파쇄하고, 현재 우리들의 토지와 몸이 저당잡혀 있는지라 보상하면 토지와 몸이 모두 벗어날 것이지만 보상하지 않으면 무죄한 이몸이 남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하늘이 감응하셔서 전국의 인민이 일심으로 협력해서 이 큰 일을 성취하여 백성과 나라를 보존케 하여주시옵소서.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 (김광제 동상 공원 표지석 발췌)

 

         @ 국채 일천삼백만원 보상 취지

           삼가 아룁니다. 대저 신하와 백성된 자 충성에 따르고 의를 숭상하면 그 나라가 흥하고 그 백성이 편안하며, 충성하지 않고 의가 없으면 곧 그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멸하게 됩니다. 이것은 고금 역사상에서 분명히 증거가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유럽에서 부강한 자와 멸망하게 된 자 또한 충과 의를 행하고 숭상하는 여하에 연유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역대의 옛일에 유럽의 먼 곳은 그만 두고라도 우리 동양의 가까운 이웃의 일로 더구나 눈으로 직접 본 것이 곧 일본입니다. 전번 청국,러시아와 개전할 때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긴 것은 군사들 가운데 죽기를 각오한 군사들이 있어 피가 비가 되고 살이 바람이 되는 속을 즐거운 곳에 나가는 것 같이 여기며, 집에 있는 백성들은 신을 삼고 패물을 팔며 여자들은 가락지를 모아 군비에 보태어서 마침내 동.서 역사상의 처음 있는 절대의 큰 공을 이루어서 위세와 무력의 광영이 온 세계에 진동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저들 오천만 민족이 하나가 열심 열성으로 충과 의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어찌 흠모 감탄하여 본 받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우리 이천만 동포는 지금 백성과 나라가 위급하고 괴롭고 고생스러운 때에 있으나 한 사람의 결심과 하나의 계획도 없이 다만 우리 황상께서는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앞을 보시며 깊이 근심하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팔짱끼고 우두커니 앉아서 멸망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근세의 새 역사를 찾아본다면 나라가 망하면 민족도 따라서 전멸된 것으로서 이집트, 베트남, 폴란드가 모두 그랬습니다. 제 몸과 집이 있는 것 만을 알고 임금과 나라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것은 스스로 함전에 빠지고 스스로 멸망하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정신을 가다듬고 충의를 분발함이 과연 이때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국채 일천삼백만원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 대한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형세 반드시 알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국고에서는 갚을 만한 형편이 어려우니 삼천리 강토는 장차 우리나라의 것 백성의 것이 아닐 것입니다. 토지가 한번 없어진다면 회복할 길이 없을뿐만 아니라 어찌 베트남 등의 나라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국민으로서도 이 빚에 대하여 의무로 알지 못한다 할 수 없는 일이요, 시세로 말하여 갚지 않을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보상하여야 하는 길이 있으니 수고롭지 않고 손해 보지 않고 재물 모으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천만 민중으로 3개월 기한하여 담배 피우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매인에게서 매달 이십전씩을 거둔다면 계산해서 거의 일천삼백만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응당 자원해서 일원, 십원, 백원, 천원의 특별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그 당연한 의무에 있어서 이런 잠시간의 결심을 가진다는 것은 저들 일본의 결사대와 신 삼는 백성, 가락지 거두는 여인들에 비해서 그 어느 편이 중하고 어느 편이 경하며, 어느 편이 어렵고 어느 편이 쉬운 것이겠습니까? 우리 이천만 동포 중에서 정말 털끝만큼의 애국사상이 있는 이라면 반드시 두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이 여기서 감히 발기하여 취지를 알려 피눈물로 호소합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대한 신민 여러분들은 보시는 대로 곧 말로 글로 서로 알리고 고해서 한 사람이라도 모르는 일이 없게 하고, 기필코 실시되어 위로는 우리 성상께 보답하고 아래로는 강토를 유지하게 된다면 이 이상 더 다행한 일이 없겠나이다.

     1907년 2월 21일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 서상돈씨 등 공함(대한 매일신보). (김광제 동상 공원 표지석 발췌)

       

 

      @ 동대 사거리에 위치한 김광제 동상 공원

   @ 웅천읍 평리에 위치한 애국지사 김광제선생의 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