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대천 시가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은 성태산을 발원지로 한 대천천과 오서산을 발원치로 하는 옥계천이 합류하여 흐르는 냇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대천천의 이름이 유수지역의 지명을 따서 청라수라 불려졌음이 천휴당 이몽규의 행장비에 기록되어 있음으로 알 수 있다.
60년 대에만 해도 대천역 서쪽은 넓은 농경지가 있었으며 논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대천천을 따라 뚝방이 이어져 있었고, 그 아래로 갈대숲 사이로 바닷물이 들락날락거리고 모래를 퍼 나르던 바지선(드럼통으로 엮어서 화물을 실을 수 있도록 만든 배)들이 오가던 모습이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일제강점기가 되어 일본인들은 수심이 얕아 그때까지 이용되던 해소포구를 버리고 현재의 대천어항으로 위치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조선배가 바닥이 평편한 판옥선이라 하천 깊숙히 올라갈 수 있는데 반해 서양배들은 선체의 바닥이 뾰쪽한 동력선이라 정박과 운행에 깊은 수심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신항만을 건설하면서 해소포구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곳을 터전으로 삶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아스라히 잊혀지고 말았다.
보령문화원 목요강좌에서 쇳개에 대한 강의가 있어 들어보았는데 어릴적 보았던 바지선이 정박하여 바닷모래를 하역하던 곳일거라는 추측이 되매 현장을 찾아가 되집어 보았다.
《△ 쇳개는 섬처럼 좀 높은 지형이고 소나무숲으로 되어 있음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고, 이곳에부터 아랫갈머리에 이르는 곳에 제방을 만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간척지는 한산이씨 집안에서 만들었다는 간척지이다.
△ 쇳개는 해소포(蟹所浦,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해포(蟹浦)에 주목해 보면 해(蟹)는 순수 우리말로 바다를 의미하는 '개'를 일켣는 것으로 보인다. 대천천 하류의 평야를 해평(蟹坪)이라 쓰고 '게들'로 말한다는 조선지지자료의 기록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실제로 보령지방에서는 바다를 그대로 '개'라고 말하였다. 갯벌에 굴을 따러 가는 것을 그냥 '개간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대천천의 하구를 모두 '개'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하구 근처의 들을 '게들'이라고 하는 것처럼말이다. 따라서 대천천 하구의 배를 대던 곳도 그냥 '개'이기 때문에 해포(蟹浦)나 해소포(蟹所浦)로 썻을 것으로 보인다.
△ 갯들이 있는 포구는 바로 대천장이 들어선 위치이다. 대천장이 들어선 곳이 바로 해소포였던 것이다. 그러면 해소포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필자는 현재 철다리에 서 부터 궁말로 건너가는 시멘트다리가 있는 곳 근처가 아닐까 한다. 이곳은 옛 대천시장인 구시와 인접한 대천천이고 노인들에 의하면 옛날에 배를 댔다고 하며, 오늘날 바닷물이 들어오는 상황을 보더라도 사리때는 얼마든지 배를 댈 수가 있다. 이곳에 배를 댈 수 있기때문에 시장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장의 모습을 서기 1900년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날에는 인군(隣郡)과 부근 각지로부터 약 1만명의 매매인이 집합하고 또 대천은 선착장이기 때문에 한국선 항상 2~3척이 출입한다.」( 보령문화원장 황의호 강의자료 발췌)≫
1913년도 발행한 지도를 보면 간척사업이 진행되지 않아 서해바다가 내륙 깊숙히 만을 이루며 갯펄을 이루고 있다. 이로 인하여 대천천이 사행천(蛇行川)을 이루며 수차례 하천길이 이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쇳개는 대천천 입구의 얕은 구릉을 이루며 소나무가 심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는 대천천 양안이 간척제방의 축조로 정확한 위치를 비정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궁촌천의 맞은편 부근으로 추측이 되며, 제방 축조로 인하여 물길이 바뀌면서 언덕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쇳개와 해포가 동일한 위치라고 생각했었는데, 자료를 검토해 보면 바다에서 해소포로 들어가는 좌측으로 낮은 구릉의 언덕이 쇳개였으며 조금 더 윗쪽으로 올라가 구시장 사거리 부근이 해소포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아뭏튼 쇳개와 해소포는 대천천 하류의 거의 같은지역에 위치하여 신시가지가 일제에 의해 조성될 때까지 보령지역의 물류이동의 중심지 역활을 톡톡히 하였다고 보여진다.
옛 뱃사람에 의하면 옛 배들은 무동력선이라서 썰물 때 바닷물이 나가는 힘으로 바다로 나가고 들물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오곤 하였다고 한다. 노를 젓는 힘과 바람으로만 들고날 수 없는 것이 바닷일이란다.
또한, 쇳개마을 사람들은 갯고랑에 소나무 말뚝을 박아 해소포로 왕래하는 항로를 안내하여 주는 댓가로 뱃사람들에게서 일정한 통행료를 징수하였다고 한다. 배가 뻘에 바닥이 닿아 오도가도 못하게 되면 그만큼 애를 먹게 되니 뱃사람들도 통행료에 시비를 걸지 못하였다고 한다.
● 위치 ; 보령시 대천동 1469 하천변
@ 대천천 하류 해안 방조제 초입 공원
@ 궁촌천과 대천천의 합류지점으로 옛 자료로는 이 부근이 쇳개의 위치로 비정된다.
@ 대천천 하류 쇳개부근의 현재 전경
@ 궁촌천 다리위에서 바라 본 쇳개 부근
@ 1947년에 촬영된 항공사진에는 쇳개의 위치가 궁촌천 입구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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