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보령시청 홈페이지에서 보령의 연혁을 살펴보면 삼한시대 마한 만로국(萬盧國, 삼한의 78개 부족국가 형성기, 삼국지한전 참고)으로 부터 시작하고 있다. 보령의 북부지역은 백제 때 신촌현(新村縣), 신라 때에 신읍현(新邑縣), 고려시대에 보령현(保寧縣)으로 변환이 있었고, 남부지역은 백제 때 사포현(寺浦縣), 신라 때에 소포현(蘇浦縣), 고려시대에는 가림현(架林縣)으로 지명이 바뀌다가 두 현이 일제강점기 통합이 되어 지금의 보령시로 변경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한 만로국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궁금증으로 남아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몰랐던 마한」이라는 책을 접하면서 미약하나마 갈증을 조금 풀게 되었다.
저자는 마한(馬韓)에 대한 기록은 3세기 후엽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마한은 진한, 변한이 함께 삼한을 구성하여 고조선의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하였다고 기록하였다.「위략(魏略)」에서 연나라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한 다음, 한나라가 침공할 것이니 막아야 한다고 준왕(準王)을 속이고 정권을 탈취하니, 준왕은 바다를 통해 한(韓) 지역으로 망명하여 한왕(韓王)을 칭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기원전 194년에 일어난 일이다. 고고학 자료에 의한 마한의 기원을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의 발굴로 추측하는데, 충남 예산 동서리 유적과 아산 남성리 유적에서 나온 동검들이 요녕지역 윤가촌 유적과 정가와자 유적 등의 고조선 유적과 상통한다. 이는 연나라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는 와중에 일부 주민들은 배를 타고 황해 연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경기만 남쪽에 이르러 태안반도의 돌출부위에 막혀 아산만 지역으로 들어와 정착한 것으로 보았다.
이들이 들어와 선주민들과 융합하여 마한 사회는 점차 주변으로 확장하여 나갔다. 「삼국지」에는 목지국, 백제국 등 55국이 기록되어 있고, 5세기 중엽 쓰여진 「후한서」에는 54국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에 기록된 마한 54국의 위치 비정에는 당시의 문헌자료가 매우 한정되어 있어 확인이 어렵다.
마한 소국들의 위치 비정 중에 보령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학설로는 이병도가 1976년도에 만로국(萬盧國)을 한자음의 유사성으로 추측하였고, 천관우는 1989년 만로국을 전남 옥구군으로 보았다. 또한 이병도가 미상으로 본 소위걸국(素謂乾國)을 천관우는 보령지역에 있었다고 보았다.
대체로 보령지역에 이병도의 학설을 받아들여 만로국이라는 마한의 소국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구체적인 나라의 위치와 정치, 사회적인 양상은 알 수 없기에 고증에 필요한 유적의 발굴, 그리고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진(秦)나라가 멸망하면서 그 유민들이 삼한의 땅으로 내려와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에 유입이 되던 시기에 마한 땅에도 고조선의 유민들이 흘러들어 농경과 수렵으로 생활하던 토착원주민들에게 북방의 새로운 문물을 전달 받으며 부족국가의 차원을 한단계 넘어서 서로 협력하는 연방체적인 소국가를 형성하였다고 본다. 이들 삼한의 소국가들은 고구려나 백제의 유입 보다도 먼저 한반도를 경영한 지배체제였을 것이다.
고구려를 이탈하여 한강변에 나라를 세운 백제국이 일시에 마한 땅을 병합하며 강대국으로 들어선 것이 아니라, 3단계에 걸쳐 3세기 말에는 차령산맥까지, 4세기 중엽에는 노령산맥, 6세기 중엽에서야 남해안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 보았다.
백제가 신라.당의 연합군에게 패망한 것이 660년이니 온전한 백제 영역을 차지한 것이 백 여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보면 마한이라는 연합체성을 가진 소국가들이 완전히 백제에게 흡수될 때까지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온 근거로 매장유물에서 나오는 금동관과 금관 등이 백제의 하사품이 아닌 마한 제국들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영위했던 물품으로 백제의 세력과 동등한 세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새로운 시각을 펼치고, 그동안 광주. 전남지역의 마한 역사 문화권 설정을 위한 각계각층의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논리를 저자는 설정하였다.
지금의 역사학계가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며 서로 반목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학설을 쫒다보면 더욱 혼란이 가중된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제시한 백제의 22담로에 대해서도 백제의 37군이 신라에 병합되면서 웅주 13군(충청권), 전주 10군(전북권), 무주 13군(광주,전남권)으로 개편된 사실에 주목하여 웅주와 전주를 합하여 22담로로 보았다(상기책, 25쪽).
하지만, 백제의 해외영토 운영에 대한 담로로 중국의 내륙이나 왜의 영토와 가야국에 담로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는 시각도 팽배하다.
역사적 진실은 오직 하나일 수 밖에 없지만, 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 다른 시각들을 가지고 하나의 진실을 찾아 가는 것은 역사학계에서 할 일이다. 평범한 향토사학들이 미시적 안목으로 그 지역의 향토사를 찾아 연구하고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고, 그 바탕으로 거시적인 안목으로 역사를 찾아가는 일은 사학자들이 하여야 할 몫이다.
2. 참고자료 ; 「양직공도」백제기사 전문과 해석문
「양직공도」란?
중국에서는 주나라 봉건제에서 제후들이 천자에게 공납하였던 의례적이고 의부적인 조공을 '직공(職貢)'이라 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그림을 '직공도(職貢圖)'라 하였다.
직공도에는 조공하는 사신의 용모를 그리고 그 옆에 그나라의 사정을 기록하였다. 기사 가운데에는 나중에 만들어지게 되는 공식적인 역사서보다 자세하고 정확한 것도 있다. 중국의 직공도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조에서 만들어졌는데 남아 있는 직공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남북조시대의 양(梁)나라의 직공도이다.
「양직공도」는 양나라 무제의 7번째 아들인 소역(蕭繹)이 제작한 것인데 후대의 문헌자료를 통해서만 알려오다가 1960년에 남경박물원에서 확인되었다. 아쉽게도 원본이 아니라 1077년 북송 때 모사되었고 일부만 남아있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원본에 충실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양직공도」에는 6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던 12개국 사신의 용모와 13개국의 기사가 남아 있는데 521년에 무령왕이 파견한 백제사신과 189자의 기사가 포함되어 있어 특히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그 내용은 백제의 기원, 고구려의 요동 점유와 백제의 요서경략, 백제에서 사신을 파견한 연혁, 고구려와 백제의 갈등, 백제의 도성과 담로, 백제의 방소국, 백제의 언어,복식,풍속에 관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百濟國使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晉末駒麗略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晉平縣, 自晉己來常修蕃貢, 義熙中其王餘腆, 宋元嘉中其王餘毗, 齊永明中其王餘太, 皆受中國官爵. 梁初以太爲征東將軍. 尋爲高句驪所破, 普通二年, 基王餘隆遺使奉表云, 累破高麗. 所治城曰固麻, 謂邑曰擔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擔魯, 分子第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巳文, 下沈羅 等附之. 言語衣服 略同高麗, 行不張拱 拜不申足, 以帽爲冠, 襦曰復衫袴曰褌, 基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
백제국 사신
백제는 동이 마한에 속하였다. (서)진 말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 (서)진 이래 조공해 왔는데 (동진)의희 연간에 왕 여전(진지왕), 송나라 원가 연간에 왕 여비(비유왕), 제나라 영명 연간에 왕 여태(동성왕) 모두가 관작을 받았다. 양나라 초에 태(동성왕)를 정동장군으로 삼았다. 몇 차례 고구려가 침략을 하였는데 (양나라)보통 2년에 그 왕 여융(무령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며 고하기를 잇따라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하였다.
그 나라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다. 22담로가 있어 (왕의) 자제종족이 나누어 다스렸다. 주변 소국으로 반파, 탁,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사문, 하침라 등이 있어 부용한다.
언어와 의복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다. 걸을 때에 팔을 벌리지 않고 절을 할 때에 다리를 펴지 않는다. 모자로 관을 삼고 저고리를 복삼이라 하며 바지를 곤이라 한다. 그 나라 말에는 중국 말들이 섞여 있으니 이는 진한의 습속이 남은 것이다.
(상기책 53~56쪽 참조)
@ 우리가 몰랐던 마한, 임영진, 홀리데이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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