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열사의 호를 보면 우록(友鹿)으로 불리었다. '사슴의 벗'이라고나 할까?
그가 태어난 곳이 지금의 대해로 구간의 대천역에서 조금 벗어 들어간 녹문(鹿門)이라는 마을이다. 녹문은 나즈막한 환산(둘릴산)이 마을를 감싸안고, 앞에는 옥마산에서 발원한 궁촌천이 휘감아 돌아가며 넓은 벌판을 적셔주기에 옛부터 '사슴의 둥지를 품은 듯한 마을'이라고 불렸다. 마을 입구에는 청백리 류경창(淸白吏 柳慶昌)의 묘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서 있을 정도로 많은 인재들이 태어난 고을이다. 그러함에 열사도 자신의 호에 사슴을 의미하는 '록(鹿)'을 품었나보다.
대천에서 21번 국도를 따라 광천쪽으로 향하다 보면 청소사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면 나지막한 구릉으로 형성된 신송리에 들어서게 된다. 유난히 낮은 구릉은 황토로 형성되어 밭작물들이 잘 될 것만 같다. 류준근 열사의 묘역은 광천천이 빙도에 닿기 전 굽이쳐 흘러 들어가는 모퉁이 낮은 구릉위에 위치하고 있다.
21번 국도를 오가며 열사의 묘역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답사 하게 되었다. 불과 백여년 전에 살았던 올곧은 선비의 기개를 흠미하기에는 정성이 미치지 않겠으나 옷깃을 적시는 겨울비 속에서 고개를 숙인다.
1919년 거국적으로 각계각층의 백성들이 일제에게 저항을 하였던 3.1운동에 유독 유림계에서는 동참이 미흡하였다. 충(忠)과 의(義)를 중시하는 유림의 사상에서 충의 대상이 군왕(임금)에게 있다는 데에서 갈등이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재적으로 반일감정을 표하던 유림에서 늦게나마 참여를 독려하는 움직임으로 파리장서운동을 펴며 전국적인 저항운동으로 확산이 되었다. 이에 주축이 된 인물들이 내포지역의 유림들이다.
보령지역에는 주로 최익현선생의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였다.
보령 5열사로 추앙되는 류준근 선생의 묘역을 답사하면서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저항을하며 봄을 기다리던 선지자의 모습을 그리며 발길을 뒤로 한다.
2. 참고자료
● 위치 ; 보령시 청소면 신송리(고잠마을) 산 18-3
@ 우록(友鹿) 류준근(柳濬根) 열사 묘
류준근(1860~1920) 열사는 보령 대천의 녹문에서 태어나 을사조약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세금 납부 거부 투쟁을 전개함과 동시에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병전에 가담해 홍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유병장(儒兵將)으로 활약 하였으며, 홍주성이 무너지자 모두 피신하기 급급했지만, 열사는 의병관련 기록을 소각한 후 체포되었다. 그후 서울로 압송 되었다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다른 8명의 의사와 함께 일본 대마도로 유배 되었다가 4년만인 1909년 고국에 돌아왔으며, 늦게 아들을 낳았지만 일제의 호적에 올리지 않는 등 일제의 정책에 계속 저항을 하였다.
1912년 고종황제의 밀명에 의해 돈헌 임병찬(林炳瓚)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을 때는 충청도지역 대표자로 임명되어 활동 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는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한 후 순종황제에게 복위하여 나라를 독립국으로 통치해 달라는 상소문을 소두(疏頭)가 되어 추진 하였으며, 조선민족대표 12인은 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 투쟁한다는 《12인등의장서》에 연명하여 총독부에 전달하는 한편,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낭독하는 활동으로 3.1만세 시위 확산을 도모하였다. 이어서 우리의 독립열망을 국제정의에 호소하는 파리장서운동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협의하고 전국의 유림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전라도 계화도에 은거하던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찾아가 동참을 권유하였으며, 또한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20년 일제의 유교 어용화 정책 반대와 유교 윤리 진작을 위하여 경향(京鄕)의 유림들이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를 설립하였을 때,경향과 지역의 유림들은 열사가 보령지역 대표가 되어주길 바랬기 때문에 열사는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예산 대흥에서 왜경이 행인들에게 전염병 예방주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열사는 왜경에게 예방주사를 맞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가 얼마 후인 1920년 8월 그 전염병으로 향년 61세에 녹문 본가에서 서거 하였다.
1977년 정부에서는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올려 추서 하였으며, 추강 백낙관, 만취 황재현, 옥재 백관형, 지산 김복한과 함께 보령 5열사 중의 한 분으로 추앙 받는다. 이곳 묘소는 2003년 새롭게 정화 하였다. (묘역 옆 안내판 참조)
@ 항일 애국열사 류준근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경(舜卿), 호는 벽서(碧棲), 우록(友鹿). 진사 형중(馨仲)의 아들이다.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납세를 거부하고 을사오적과 일본의 침략행위를 공박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6년 5월에 전 참판 민종식이 홍산지치(鴻山支峙)에서 거의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홍주성을 함락한 뒤 유병장과 참모에 임명 되었다.
5월말 홍주성이 함락될 때 일본군에게 잡혀 무기형을 언도받고 남규진(南圭振) 등 8인의 동지와 함께 대마도로 유배 되었다. 그뒤 최익현이 유배되어 오자 척사사상을 논하고, 우국시로 화답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백관형(白觀亨) 등 10여명과 함께 상경하여 순종의 복위운동을 꾀하던 중 일본경찰에 잡혀 그해 11월 징역 6개월형을 선고 받았다.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에 유림대표 137인 중 1인으로 서명 하였으며, 일반 유림인사들의 안이한 수사선도(守死善道)에 반대하고 적극적인 독립투쟁 전개를 역설하였다.
문집 「마도일기(馬島日記)」는 홍주의진의 활약과 대마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일기체로 서술한 것으로 의병운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 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올려 추서 하였다. (묘역 입구 안내판 참조)
@ 독립운동가 류준근 묘역 입구(청소면 신송리 산 18-3)
@ 애국열사 류준근 묘와 항일운동 사적비
@ 애국열사 류준근 묘와 항일운동 사적비
@ 열사묘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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