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93편; 성주 고운 최치원선생 신도비

푸른나귀 2020. 4. 3. 16:44

 

1. 들어가며

 

 남북국시대인 통일신라 말기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최치원 선생은 본국에 돌아와 당의 선진문명을 이땅에 펼치고져 하였으나, 6두품이라는 출생적 신분에 가로막혀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전국을 돌며 유람을 하다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성주사지의 낭혜화상비와 관련이 있다.

 신라 선종의 최대사찰인 성주사의 주지스님이었던 무염대사가 88세에 열반을 하자 그의 제자들이 왕에게 비문을 요청하자 왕은 최치원선생에게 그임무를 수행하라는 명을 내리고, 최치원선생은 몇번의 사양끝에 임무를 맏았다고 한다. 그가 성주사에 머물면서 무염대사의 비문을 작성하면서 서해 절경인 이곳을 찾아 머리를 식히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제18편 ; 육지로 변한 보리섬- 최치원선생 유적지 참조)

 대동여지도에는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를 고운비(孤雲碑)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치원 선생은 호를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을 주로 써 왔는데, 그 시대의 지식계층에 있으면서도 정치권력의 주류층으로 뜻을 펼칠 수 없기에 외롭고 고독한 바다의 구름을 빗대서 호를 지었나보다. 그 고독함이 그를 우리나라의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봉(巨峰)으로 만들었다고 본다. 

 성주사지의 낭혜화상비 비각 뒤편으로 경주최씨 문중에서 세운 '최고운 선생 신도비'가 세워져 있음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별로 관심을 갖지 못하여 스쳐지나가곤 하였는데, 오늘은 마음을 먹고 다녀왔다.

 성주사지의 돌담 옆으로 난 소로를 통하여 산자락 밑으로 가까이 가자 벽돌 개방담장 안으로 신도비가 중앙 계단석을 올라가자 검은 오석으로 세워져 있다. 일부 난간석이 파손된 상태로 방문자가 드문지 철문도 녹이 슨 상태로 눈에 거슬리게 하였다.

 비각의 전면 큰 글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을 각자한 것이며 측면과 후면에는 최치원 선생의 행적을 기입하였으며 비를 세운 시기가 1974년으로 기록 되어있다.

 신도비 하단 우측으로 3기의 비가 나란히 서 있는데, 그 중 앞의 '신도비 보수 정화 기념비'가 1989년에 세운 것으로 기록 되어 있는데 아마 신도비가 세워지고, 15년이 지난 후 다시 정비를 하고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나보다. 이 신도비를 세울때 주로 경주최씨 문중의 이름들이 많이 기록 되어 있으나, 지역의 기관장 및 유림들의 이름들이 각인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역 단체들이 합심하여 최치원 선생을 기리고져 한 것으로 보인다.

 

 봄 기운으로 파릇한 성주사지에 세워진 국보 8호인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의 비각을 바라보고 있는 신도비에 고운 선생의 넋이 서려 있다면, 1천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의 성주사지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 위치 ;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