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89편 ; 주포 마강리 밀양박씨(密陽朴氏) 열녀비각

푸른나귀 2020. 3. 3. 18:05


1. 들어가며


 주포면은 일제 강점기 전까지는 보령현의 중심지로 관아가 있는 읍성이 있던 고을이었다.

 광천에서 21번 국도를 따라 청소를 지나 마강리에 들어서는 삼거리를 약간 지나다 보면 국도변 우측으로 느티나무 아래 오래된 비각이 서 있다.

 이곳을 오며 가며 누구를 위한 비각인지 확인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차를 멈추지 못하고 다음으로 미루기를 몇 번이나 했었다.

 겨울이 물러나고 개구리가 나온다는 경칩에 다가오는 시절에 발길을 멈추어 보았다.

 곡선의 미를 자랑하는 동구밖 느티나무 아래 열녀비가 모셔저 있는 비각을 둘러보는 도중에 그 주변에서 봄을 맞이하면서 농사준비를 하는 동네 어르신을 만나 그 비각의 내력을 들어볼 수가 있었다.

 공주로 공부하러 갔던 최종환이 집으로 돌아오자, 집안 어른들은 공부에 지장이 있다하며 며느리를 보지도 못하게 하고 다시 공주로 보냈다고 한다. 최종환이 학업을 하다가 사망을 하자, 크게 낙심을 하던 부인이 마을 어귀 나무에 목을 매 자살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주고등보통학교는 1922년 5월에 개교를 한 공립 공주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그 당시는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이 함께 다니던 학교로 충청도 지역의 지주계층의 명석한 청년들이 입학하던 학교인데 일본인 학생들과의 갈등으로 동맹휴학사건을 1927년에 크게 일으킨 사실로 보아 농촌 지식청년층이라 할 수 있었던 최종환의 죽음도 이런 학교내의 사정과도 관련이 있을 성 싶기도 하다.

 밀양박씨 또한 19세의 어린나이로 농촌 총각에게 시집을 와 전통적인 유교사상으로 점철된 양반댁 가문의 도리와의 갈등 속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해야만 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의 희생물이 되었다는데 안타까움이 앞선다. 조선의 전통적 사상이 붕괴되어 가던 일제강점기 시절에 한 젊은 청년과 한 여인의 가련한 슬픔 앞에 옷깃을 여미게 하는 씁쓸함이 묻어난다.


 보령지역의 열녀비, 효자비, 열녀각, 정려각이 수없이 많은데 대부분 영,정조 시대에서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지방 유림들의 청에 의해 조정에서 현판이나 현액을 하사하여 세운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곳의 열녀비각은 위와는 달리 일제 강점기 지역 유림들이 십시일반하여 열녀비와 비각을 세운 것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마강리는 보령읍성과 보령향교가 있는 보령리와 가까워 유림들의 큰 힘으로 이 비를 세운 것으로 생각이 된다.



2. 밀양박씨(密陽朴氏) 열녀비각


    * 위치 ; 보령시 주포면 마강리 312-2

    * 시대 ; 1929년


  열녀 밀양박씨는 주포면 마강리에 살던 최종환의 처로 19세에 출가 하였는데, 남편이 공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졸도하여 사망하자 남편을 따라 죽으니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1929년 열녀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 하였다. (현장 안내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