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87편 ; 남포 신안서원(新安書院) 터

푸른나귀 2020. 2. 15. 15:50


1. 들어가며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향교와 서원이 있었다. 보령지역의 향교는 관학기관으로 남포향교, 보령향교, 오천향교가 있으며, 사학기관인 서원으로는 광해군2년(1610년)에 설립하여 숙종12년(1686년)에 사액된 화암서원이 청라에 지금까지 현존되어 있으며, 남포지역에 정조말년(1797년)에 현감 권상신(權常愼)과 지역 유림들의 성원으로 신안사(新安祠)가 설립되었지만 대원군의 사원철폐에 의하여 사라지게 되었다.

 신안사는 설립과 동시에 파당에 의한 철폐와 복설의 부침을 당하면서 지역의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의 장으로, 또 주자를 비록하여 이 지역에서 활동해 온 현인들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으로 존속이 되어 왔으나, 이제는 주택가 한 켠의 정원 속에 건물의 주춧돌로 쓰였을 돌덩이 몇 개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남포면의 읍내삼거리에서 무창포쪽으로 남포저수지를 지나 월전로를 따라가다가 우측으로 신흥리 들어가는 농로길을 따라가면 매내길이 나온다.

 동네 뒷편으로는 잔미산에서 흘러 들어온 낮은 산으로 둘러처져 있으며, 앞으로는 남포방조제로 둘러 감싸 안은 넓은 평야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방조제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이곳 가까이 까지도 파도가 넘실 댓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곳을 터전으로 하여 서원을 설립하고 글 읽는 소리가 파도소리와 함께 지역 유림들의 귀에 울렸을 것이니 얼마나 뿌듯한 긍지를 가졌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 신안서원지(新安書院址)


     * 위치 ;  보령시 남포면 신흥리 70번지 일대 (매내길 2-15 부근)


 서원은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후진 교육과 선현(先賢)의 제사 기능을 하였던 곳이다.

 신안서원은 1797년(정조21) 이곳 주변의 지명 중 '무이산(武夷山)' '신안(新安)' 등이 주자의 중국 고향 지명과 동일하다는 점과 우리나라 성리학의 도입자 백이정의 고향이 남포현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태학(太學)과 본현(本縣) 유생들의 노력으로 창건되었고 주자 영정과 백이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영.정조 당시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서원 남설(濫設) 금지령에 의하여 창건되던 그 해인 1797년 본도 관찰사 한용화(韓用和)가 조정에 보고한 후 철폐하였다. 그 후 중앙과 지방 유생들의 노력으로 1807년(순조7년)에 다시 복설(復設)되어 주자(朱子)와 이재 백이정(彛齋  白이正),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익제 이제현(益齊 李齊賢),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을 배향 하였는데 노론 기호학파의 학맥과 남포현 토착세력의 상징성을 띠었다. 그 후 몇 차례 개수(改修)되면서 60여 년 간 지속되다가 1864년(고종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1864~1871년 사이에 철폐되어 현재는 몇 개의 초석과 '서원 터','홍살문 앞' 등의 지명만이 남아 오면서 과거 신안서원의 사실을 말하여 주고 있다. (현장 안내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