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대부분 옛 성벽의 흔적을 답사하고자 할 때에는 잡풀이 무성한 철을 피해 하는 것이 성벽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관찰법이다. 남포읍성은 세종27년(1445년)에 축조 되었는데, 60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면서 형태가 많이 홰손 되기도 하였지만 그 당시의 모습을 유추해 보기는 어렵지 않다.
조선시대의 성벽을 쌓는 역사는 대부분 그 지역 사람들이 군역을 대신하여 동원되는데, 규모가 좀 크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동원이 되어 2~3개월 동안 교대로 축조를 하기도 하고, 각 절에 있는 스님들을 동원하여 승군을 편성하고 성 쌓는 일을 도맏게도 하였다.
이곳 남포읍성을 쌓을 때도 충청도 영동 사람들이 동원되어 쌓았다는 흔적이 동북쪽 성벽의 돌에 '영동인(永東人)이라 각자가 된 초석이 있다고 하여 답사를 했는데 이는 요즈음 '공사 실명제'에 해당되는 조선시대의 공사 실명제로 축조 후 붕괘되는 부실공사를 방지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보인다.
차분하게 찬찬히 둘러 보았지만 '영동인(永東人)이라는 각자를 이끼가 끼어선지 이번 답사에서 찾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주 성문 앞에 세워졌던 아문은 대부분 통일된 형태로 세워졌다. 남포읍성의 정문인 옥산아문은 후에 동헌 앞으로 위치가 옮겨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추후에 다시 복원이 된다면 원래의 위치로 옮기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그러면서 세곳의 성문 위치의 옹성 또한 사료에 근거하여 복원 한다면 읍성의 가치는 더 할 것으로 생각이 든다.
남포읍성의 복원은 서쪽과 북쪽, 그리고 동쪽의 일부 구간이 복원 되어 있으나, 조선시대 축조 방식에 어긋나게 축조를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의 소리를 듣기도 한다. 비록 예산의 부족으로 복원이 늦더라도 원래의 모습을 확실한 고증을 통하여 옛모습에 가깝게 축조를 하여야 문화재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2. 남포읍성(藍浦邑城)
* 지정 ; 지방기념물 제10호(1973년 12월 24일)
* 위치 ;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378-1
남포읍성(藍浦邑城)은 차령산맥(車嶺山脈) 끝자락 평지에 쌓은 성으로 고려시대에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위해 성을 쌓았고, 우왕(禑王) 때 석성(石城)으로 축성하여 공양왕2년(1390년) 완성하고 군영(軍營)을 설치 하였다. 조선 태조6년(1398년)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두어 현사(縣事)를 겸하게 하였고, 서해로 출몰하는 왜구를 물리치고 민심을 바로 잡았다. 길이 900m, 높이 3.5m의 수직 성벽에 미석(眉石)과 여장(女薔)을 두었고 사방에 치(稚)를 두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동,서,남 3대 성문을 두고 옹성(甕城) 형태로 만들어 외부에서 성문을 찾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내에는 우물이 3곳이 있었고, 서쪽 성벽에 수구(水口)가 남아 있으며, 당시 건물로 동헌(東軒), 옥산아문(玉山衙門), 진서루(鎭西樓)가 보존되고 있다. (현장 안내문 발췌)
@ 성벽 서쪽과 북쪽사이 복원 된 치(稚)
@ 북쪽의 복원 성벽
@ 성벽의 하단부 석축의 모습
@ 북쪽과 동쪽 성벽의 모서리 부분 치(稚)
@ 동쪽 성문자리 옹성(甕城)
@ 복원이 되지 않은 동쪽 성벽
@ 복원 되지 않은 남쪽 성벽과 치(稚)
@ 남쪽 성벽 옹성 터
@ 서쪽 성벽 상단부와 성 내부 토사 성벽 전경
@ 성벽 서쪽과 북쪽사이 복원 된 치(稚)의 상부 부분
@ 일부 복원된 서쪽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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