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보령지역에는 각 씨족마다 조상들을 흠양하는 재실을 두고 있다. 이 중에 문화유적으로써 중요한 자료로 지정이 되어 보존 되고 있는 재실은 이곳 염씨 종중에서 소유한 수현사(水鉉祠)와 경주이씨가 소유한 용암영당(龍巖影堂)이 있다.
이 두 재실은 보령호를 중심으로 서로 맞은편의 산자락에 위치하는데 이는 웅천천을 가로 막으면서 보령댐이 설치되자 그곳에 모여 살던 염씨문중의 염뜸마을과 경주이씨 문중의 용암마을이 수몰로 되면서 지금의 위치에 수현사와 용암 밑 기슭으로 삼은당이 옮겨지게 되었다.
수현사는 도화담 삼거리에서 판교면쪽으로 보령호의 남쪽 기슭을 따라 617번 지방도를 달리다 보면 보령댐 애향 박물관을 못미쳐 좌측으로 있다. 솟을대문 1동과 사당 1동이 담장으로 둘러쳐저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당의 좌측으로 황룡과 잉어, 우측벽에는 청룡과과 호랑이의 벽화가 그려저 있고, 내부에는 영정을 모시고 위패가 설치되어 있는데, 아마 영정은 관리사에 보관을 하고 행사시에 모셔지는지 비워져 있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보령댐의 수위가 제법 높아져 있고, 건너편 용암의 위용이 추운 겨울날씨를 비웃는 듯 우뚝 서 있다.
이곳 염뜸마을은 임진왜란(선조25, 1592) 당시 파주염씨 씨족이 전라도 나주와 보성 등에서 피난을 와서 정착하여 8대(약 400년)에 걸쳐 대대로 용수리에서 살아왔다 한다. 수몰 이전에 20여 가구의 염씨들이 살았으며, 임진왜란 당시 이곳으로 피난을 와 자리를 잡은 13세손 학운은 보령의 입향조이다.
염씨는 삼한시대에 중국 후당때 건너와 파주에 터를 잡은 염형명을 시조로 하는데, 그 뿌리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고려말의 염제신을 중시조로 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댐이 설치(1990년)되기 이전에는 지역 유림들이 대제를 지내왔으나, 댐 설치 이후에는 보령지역 후손들이 대제와 함께 가을철에 시제를 지낸다고 한다.
2. 수현사(水鉉祠)
* 위치 ;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275-3 (판미로 884)
* 지정 ; 문화재자료 제142호(1984.05.17)
고려 후기의 명신 염제신과 그의 아들 염국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충경공 염제신은 고려 문신으로, 어려서 고아가 되어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자랐다. 원나라 태정황제를 시종하여 총애를 받았으며, 귀국하여 충숙왕의 신임을 받기도 하였다. 여러 벼슬을 하였고 시호는 충경이다. 염국보는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아들로 고려 문신이다. 학문 경향은 성리학을 수용하였으며, 안렴사로 지방에 파견되어 폐단을 다스림으로써 개혁에 참여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10년(1873) 처음 세웠는데, 보령댐 축조로 1999년에 옮긴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원래는 길 아래 용수리 산27번지에 있었으나, 보령댐 축조로 1999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사당은 그 후손들이 향사(享祀)를 목적으로 세우고 춘추로 유림과 후손들이 제례를 올린다. 목조와가인 이 건물은 전면 3간, 측면 2간의 맛배집으로 보통 사당의 격식으로 꾸몄으며 솟을 3문도 있다.
사당에 봉안된 염제신(호: 매헌)은 파주염씨의 중흥시조이시며, 벼슬은 고려 공민왕때 좌, 우정승을 지냈고, 우왕때는 영문하부사에 오르고, 곡성부원군이 되셨으며, 원나라에 치사(致仕)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고, 국내에서 요직을 거치는 동안 나라에 많은 공헌을 하셨으며, 그 아들 염국보도 공민왕 4년(135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대제학과 지춘추관사에 올랐으며, 서성군이 되셨고 파주염씨 국파공파의 제일 윗분이다.(보령시 홈페이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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