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83편 ; 관촌수필(冠村隨筆)의 관촌 마을

푸른나귀 2020. 1. 27. 16:01


1. 들어가며


   우리 고향의 문인으로서 고향의 정서를 그림을 그리듯 글로써 맛갈스럽게 창작한 이는 드물지 않다.

   오래전에 그의 작품을 거의 읽으면서 향수를 자아내게 했던 작품들을 고향에 돌아와 다시금 새로 읽어보니 그의 명성이 왜 이렇게 자자한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대표작 '관촌수필'은 1972년 『현대문학』에「일락서산(日落西山)」을 발표하면서 1977년 『월간중앙』에「월곡후야(月谷後夜)」를 발표하기 까지 총 여덟편의 중단편을 결합하여 소설로 발표하였다.

 그는 해방 이후, 정치적 좌우투쟁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4.19혁명을 거쳐 독재적인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이념화와 서구화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해온 우리 민중들의 전통적인 삶과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였다는 데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유년시절을 지내온 관촌마을은 그의 문학적 특질을 형성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고 본다.

 

 여기서는 그의 문학적인 토대를 이루게 한 유년시절의 관촌마을을 들러보고 그 흔적을 찾아보고자 한다.

 관촌마을은 구 대천역에서 대천여고쪽으로 한 5백미터 가다보면 우측으로 주유소가 있는데, 주유소 측면으로

지역문학단체에서 세운 '관촌마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안쪽으로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있고, 나지막히 밭두렁과 토담을 한 오래된 집들이 보인다. 그 집 뒤로 지금은 양식 2층집이 있는데 이곳이 작가가 태어나고 유년을 보낸 집터이다.

 「일락서산(日落西山)」에서 ' 방파제 곁으로 장항선 철로가 끝간데 없고, 철로와 나란히 자가마다 뽀얀 신작로는 모퉁이를 돌았는데, 그 왕소나무는 철로와 신작로가 가장 가까이로 다가선, 잡목 한 그루 없이 잔디만 펑퍼짐한 버덩 위에서 4백여 년이나 버티어 왔던 것이다.(관촌수필, 랜덤하우스,2007, 11쪽)'라고 표현 하였다.

 그 왕소나무는 토정선생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자라서 4백년이나 자랐다하고, 그 장소가 현 주유소 부근 삼거리의 모탱이였을 것인데 현재는 모탱이가 깎이어 옹벽이 높게 쌓였으며, 도로변으로 공덕비가 몇 기 서있을 뿐이다.

 장항선 철로도 신역사의 이주로 건너편으로 옮겨지고, 바닷가에 출렁이던 파도 또한 저 멀리 왕대산쪽으로 방파제를 따라 물러가고 철도변 초가 송방들은 스러질 듯 남아 있다. 

 작가가 뛰어 놀았던 칠성바위와 그의 할아버지 헛묘가 들어섰던 범바위는 집터 옆으로 아마 아파트 군락과 절터 부근으로 추정이 되며, 뒷산의 부엉이가 울어대던 고갯길의 흔적도 세월 속에 공원의 산책길로 변하여 묻혀 있다.

 건너편 왕대산의 도깨비 불이 지금이라도 나타날 것인양 그 시대에서 60여년이 흘렀지만 희미한 옛 관촌마을을 더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천역이 문화의 전당으로 바뀔 무렵, 이문구 문학관을 조성한다 하여 지자체와 문인단체, 그리고 유족들이 합심하여 문학관을 추진하였으나, 불행스럽게도 서로 간의 불협으로 추락하여 그 사업은 물을 건너가게 되었다. 관촌마을 초입새에 눈길도 닿지 않는 주유소 한 귀퉁이에 세워진 기념비가 문학을 사랑하는 향토민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는 문인의 위상을 어찌 말로 표현을 하랴...

 다른 지역의 문인들은 출생지 뿐만 아니라, 작가가 창작을 하였던 지역에서도 기념사업을 하고 또,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의 견학지로 조성을 하여 스토리텔링의 중요한 자원으로 활용을 하여 수입원을 창출하는데 하물며 이곳에서 태어난 관촌리가 있고, 창작활동을 한 청천저수지변 장산리 집필터가 남아 있는 이곳에 그를 기리는 문학관이 없으니 후대에 이지역 출신의 유명한 후배문인이 탄생되길 바랄수가 있을까  아쉬울 뿐이다.  


       * 위치 ; 보령시 대천동 387번지


 

 

  @ 이문구 선생의 생가터 입구

  @ 대천 읍내로 들어서는 골목 

  @ 작가가 태어난 집터엔 2층 주택으로 들어서 있다.

   

  @ 지역문학단체에서 세운 관촌마을 안내비

  @ 마을입구 은행나무 두 그루

  작가의 생가터 아래의 돌과 흙으로 축성된 돌담.

  @ 미나리꽝으로 쓴 마당 밑 박 우물터였을 것으로 보이는 우물

  @ 칠성바위와 범바위가 있었을 마을 언덕(건너편 신작로와 철도길을 너머 갯벌과 왕대산의 현재 모습)

  @ 솔부엉이가 밤마다 울었을 고갯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