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명절이 되어 자식들이 품에 돌아와 북적거리다가 썰물 같이 빠져 나가면 마음이 헛헛 해진다.
연휴 마지막 날 모두를 떠나보내고 마눌님과 보령호 부근 금강암을 찾았다. 댐으로 수몰되어 예전의 도로는 호수를 중심으로 양편 산자락을 타고 개설되어 사시사철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겨울철인 지금은 한가하기 그지 없다.
도화담 삼거리에서 웅천쪽으로 약간 가다가 우측편으로 성주천과 웅천천의 합류지점을 통과하여 구불구불 양각산 줄기를 따라 보령댐쪽으로 가다보면 그 깊은 골짜기에도 사람들이 사는 정경이 눈에 띈다.
눈이라도 많이 내리게 되면 아스팔트 포장도로이지만 눈길에 차량운행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양각산 등산로 입구가 서너곳에서 이루어지는데 금강암에서도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금강암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건너편 바위틈에서 놀란 고라니가 산등성이로 튀어 오른다. 얼음 녹은 개울물의 지즐거림도 찬바람에 맑고 고운 음색으로 귀에 들어온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극락전에 들러서 미륵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방문화재인 미륵불 앞에 머리숙여 기도하며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불상 앞을 한참이나 서성이게 한다.
왕족의 후원으로 미륵불을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민중의 애환을 달래다보니 돌부처도 민중을 닮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금강암 석불은 현재의 위치에 보존을 하고 있지만, 금감암을 축조하면서 세운 비석의 조각은 보령 박불관에 옮겨 소장이 되고 있다.
2. 금강암 석불 및 비편(石佛 및 碑片)
* 위치 ;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산 59
지정 ; 지방 유형 문화재 제158호 (2000년 9월 20일)
금강암은 조선3대 태종의 후비(后妃)였던 권씨의 소원을 빌기 위한 원당(願堂)으로 무학대사의 제자 영암(玲암)스님이 1412년(태종12)에 건립하였는데, 건립을 주관한 사람은 후비 권씨의 아버지인 권홍(權弘)과 딸인 옹주이씨였다. 이때 조성된 석불은 2단의 좌대 위에 양손을 가지런히 하여 연꽃 봉우리를 받쳐 들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미륵불로 추정된다. 재료는 사암(沙巖)이다.
금강암과 석불 조성사실을 기록한 비편은 현재 절반 정도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는데 청석에 16줄 241자만 남아 있다. 비편의 기록은 조선 초기 왕실의 불교신앙 모습과 금강암과 석불의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다. 최근 극락전 해체 과정에서 나온 영조 때 만들어진 상량문에도 비편과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장 안내판 발췌)
미륵(彌勒)이란?
범어 Maitreya, 대승보살, 매저려야(梅咀麗耶), 매저리(梅低梨), 매항려(梅恒麗), 매항려약(梅恒麗藥) 등으로 불린다.
미륵은 보살의 姓이다. 자씨(慈氏)로 번역하며,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범어 Ajita)로 무승(無勝),막승(莫승)이라 번역하는데, 혹은 이름은 아일다,성은 미륵이라고도 한다.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집에 태어나 석존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 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석존보다 먼저 입멸하여 도솔천에 올라가 하늘에서 천인들을 교화(敎化)하고 석존 입멸 후 56억 7천만년을 지나면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한다 한다.
그때 화림원(華林園)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도하여 3회의 설법으로서 석존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불의 제5불,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금강암 주지(미륵전 앞 안내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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