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81편 ; 용암마을이 품은 삼은당(익재선생 재실)

푸른나귀 2020. 1. 9. 18:48


1. 들어가며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처음 들여온 것이 1289년(고려 충렬왕 15)에 안향(安珦,1243~1306)선생이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주자전서』를 가져온 시기를 공식적인 성리학의 유입으로 본다.

 그러나 최근에는 몽고의 침입으로 남송이 멸망할 무렵 중국 송나라의 절강성에서 유명한 학자 정신보(정신보,?~1271)가 고려국의 간월도로 망명을 하여 서산정씨의 원조가 되면서 후학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친 것이 밝혀져 안향의 성리학 전래보다도 적어도 50년은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보령 출신의 백이정(白이正,1247~1323)은 충선왕을 따라 원경에서 10년을 머물며 성리학을 배우고 고국으로 돌아와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전파를 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이제현, 박충좌, 이곡, 백문보 등 많은 문인들을 배출 하였다.

 이제현의 문하인들로 한산 출신 이곡(李穀,1289~1351), 이색(李穡,1328~1396) 부자는 초창기 성리학 전파에 많은 공이 있다. 이곡은 원나라 정동성 향시에 수석으로 급제를 하고, 이곡의 아들 이색은 이제현의 문인으로서 정몽주, 길재와 더불어 '고려 삼은(高麗三隱)'으로 불릴 정도로 칭송을 받았다. 


 1990년 양각산과 중매산 사이에 보령댐이 구축 되자 옛 용암마을이 수몰이 되어 그곳에 있었던 이제현 재실도 마을 윗쪽으로 옮기게 되었다.

 보령댐이 설치되기 전의 풍경을 되 살려보면 부여 외산면과 성주면의 성주산 계곡물이 미산에서 합류되어 큰 내를 이루며 이땅으로 흘러들어 좌우측으로 큰산으로 둘러쳐진 협곡의 형태를 이루었으리라 짐작된다.

 개천 주변으로 농수가 풍부한 전답이 있어 한 집성촌을 이루기에는 부족함이 없었겠다. 수려한 산수와 포근한 마을을 이루어 옛날에 큰 인물이 나기에 적당했던 것인가 보다. 양각산 용바위의 정기가 이 마을에 서려있을 것 같은 풍경이다.

 올망졸망 여러채의 집들과 골목들이 세월의 수상함 속에 물속으로 가라앉고, 이곳을 떠나면서 세운 '용암마을 옛터'를 기념하는 기념비에는 떠나는 이들의 향수가 느껴진다. 기념비의 뒷편에 새겨진 마을 약도에는 골목을 뛰어 다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지금이라도 각인된 약도에서 쏟아져 나올것만 같다. 

 익제선생은 이곳이 후대에 푸른파도가 일렁이는 호수로 변하리라고 생각이나 하셨을꺼나?


2. 용암영당(龍巖影堂) 사적기


      * 지정 ; 충남 문화재 자료 141호

      * 위치 ;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산 33-17


  용암영당(龍巖影堂)은 고려말 명신인 익제공 영정을 봉안한 영당이다. 익제공의 휘는 제현(齊賢)이요. 관은 경주(慶州)라. 려말 거유 석학으로 불고의 명현 명재상으로 태상 익 문충(文忠)이니 7대왕을 모시고 네번 재상에 오르신 도덕문장과 위훈대업이 관우 일세였으며 네살 된 공양왕을 무릎에 안으시고 10년 동안 섭정을 하신 삼한삼중 대광(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익제선생(益齊先生)은 국난을 극복하여 충간제민(忠諫濟民)한 대도의 재상이시고, 원제(元帝)가 정동행성을 고려에 설치하여 원나라의 속령으로 만들려고 할 때 국기국(國其國) 인기인(人其人)이란 중용(中庸)과 구경(九經)에서 도출한 명언으로 원제를 변효하여 원제가 부끄러워 하며 익제공을 위하여 만권당을 창건하고 공으로 하여금 원나라의 인재들을 교육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1367년 7월 29일 공민왕 16년에 81세로 하세하니 공민왕 묘정(廟廷)에 배향하였고 국내 6서원 5영당 2개 사당에서 매년 제향한다.1997년 10월 27일 삼원당 신축복원 때, 공의 아버님이신 호 동암공(東庵公) 휘 전(塡)은 친시인 성균시에 천장등제 하고 검교 첨의정승(檢校僉義政丞)에 오르시고, 임해군(臨海君)에 피봉(被封) 되시었으며, 시문이 뛰어난 제자백가에 통하였고 익(謚) 문정공(文定公)이시다.

 동암공의 위비를 익제공 우측에 봉하였다. 그리고 1998년 5월 각파 대종회장단의 합의와 중앙화수회의 협의하에 우리 중흥조이신 열헌공(悅軒公) 위비를 윗자리에 뫼시니 이로써 삼사당은 조손 삼세삼공을 봉안한 자손만세 조우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용암영당의 창건은 조선시대 말기 영조 16년(1740년)에 후손들이 향사(享祀)를 목적으로 이곳에 세웠으나 그후 쇠락하여 1960년에 중수하였다. 그러나 1990년 보령댐의 건설 공사로 인하여 영당이 수몰케 되어 부득이 전 사당의 위쪽, 현 위치에 목조 와가로 전면 삼간 삼사당과 측면에 30평의 문충제 및 소슬 삼문을 갖춘 우리 한옥 전통전각양식의 위용을 갖추었으며 삼사당 앞 도로 건너편에 110평의 문충예학관과 30평의 관리사 두 동이 연립 되어 있고 동시에 400여년 된 보호지정 은행수도 옮겨 심었다. ( 현장 안내판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