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1895년 오천의 충청수군절도사영이 폐영되자 오천에 살고있던 주민들은 오천군의 설립에 온 힘을 다했다.
오천군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오천수영성의 땅으로는 이웃의 남포군이나 보령군에 버금가는 지역민의 확장과 군세를 넓힐 수 없으므로 지세의 확보가 가장 걸림돌이 되었다. 오천의 유지들은 수군절도사가 있었던 지역의 긍지를 가지고 정치,관계 요로에 탄원을 하여 1901년 오천군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때에 홍주에 속해있던 천북면이 오천으로 흡수되고, 홍주관아와 안면도가 관리하던 안면도 앞 바다의 서해도서까지도 오천군으로 흡수가 되어 오천군은 군청 소재지로서의 명분을 갖게 되었다.
천북면과 서해의 도서가 오천군으로 편입이 됨으로써 현재에 보령시가 서해도서와 앞 바다를 관리하게 되는 주요한 근간이 되었으니 그 당시의 오천에 살고 있었던 주민들의 힘이 대단 하였다고 본다.
오천군은 후진들의 교육을 위해 향교를 건립하는데 유림과 군수가 힘을 합하여 1905년 대성전 건물을 완성하였다. 그러한 사연으로 오천향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향교가 되었을 정도로 지역민의 열의 또한 강성 하였다고 보인다.
하지만 1914년 일제 강점기 부군 통폐합령에 의거 남포군의 군내,신안,북내, 웅천,고읍,불은,습의,북외,심전의 9개면과 오천군의 천동,하남,하서, 천북의 4개면과 결성군 가산면의 죽현,농현,감리,신리,마촌,점촌,6개리, 홍산군 상서면의 자명리를 병합하여 보령군으로 개편이 되었다. 그 후 장항선이 1931년 천안에서 남포역 까지 연결 되면서 대천역이 주요 교통지가 되자 오천은 면단위의 작은 마을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지금의 보령시라는 도농복합도시로 발전하게 된 원인으로 조선 말 일제강점기 때 오천의 역활이 크게 작용 하였다고 본다.
@ 2018년 08월 촬영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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