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보령 출신의 영의정으로는 아계 이산해와 태초(太初) 강순을 손에 꼽을 수 있겠다.
아계 이산해의 묘소는 예산에 있으나 강순장군의 묘소는 보령의 미산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산해의 묘와 강순의 묘를 한번 답사하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봄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농막일을 포기하고 우선 강순의 묘를 답사하려 핸들을 잡았다.
도화담 삼거리에서 주산쪽으로 보령호를 좌측으로 끼고 활짝 핀 벚나무꽃의 호위를 받으며 보령댐 애향박물관을 지나 자라실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받고, 봉성보건소 삼거리에서 또 좌회전을 받아 1km정도 달리니 목적지가 보인다. 길 옆 전봇대에 '영의정 강순장군묘' 길안내판이 걸려있다.
차를 주차시키고 산자락의 사당을 둘러보고 네비를 켜서 '영의정강순의 묘'를 도보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우측의 골짜기로 우회를 하여 학적골 골짜기로 들어섰는데 숲속에서 헤매게 되었다. 다행히도 산자락에서 드릅과 염소를 키우는 농부를 만나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었다.
한 골짜기를 돌아 능선부위에 있는 강순장군의 안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한 국가의 만인지상 일인지하에 자리했던 영의정이었는데 묘 앞에 비석도, 상석도, 망부석도, 문,무인상도 없이 묘의 기단석 위의 봉분마져 잔디도 채 자라지 못하고 흙무더기가 쏠려 내려져 있었다.
그가 심었다는 수산리 소나무는 무성한 잎을 하늘을 향해 넓직히 펼치며 굳세게 자라고 있는데, 분토로 돌아간 육신이 묻혀있는 이곳은 황망한 느낌이 든다. 찾아오는 사람은 없어도 고라니는 자주 찾아와 놀다 가는지 후두둑 숲속에서 뛰쳐나와 아랫쪽으로 사라진다.
강순은 사후 시신이 수습되어 산수동 소나무(제58편 ; 보령 산수동 소나무 참조)가 있는 곳에서 멀지않은 주포면 관산리 배재산 아래 묻혔었다. 그러나, 1994년 대천대학(아주자동차대학)의 건물이 준공되기 전 미산면 봉산리 이곳으로 후손들에 의해 이장이 되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임도를 따라 내려오니 사당의 돌담을 끼고 좌측으로 올라오면 될 것을 표지판 하나 없고, 안내판 하나 비치되지 않아 이곳에 관심을 갖고 참배하려는 후인들에게 몸고생을 시킨 처사가 못마땅 하다.
하기사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이르렀던 인물을 만나려면 이쯤의 고생은 감내하는 것이 마땅할지도 모르겠다.
몇일 후 강순장군의 본관이 어느 자료에는 곡산으로, 어느 자료에는 신천강씨로 기록이 되어있어 확인해 보니 신천강씨의 시조 강지연(康之淵)의 6세손인 상산백 강서(象山伯 康庶)를 곡산 강씨의 중시조로 하는 같은 씨족이었다. 2015년도 신천강씨의 인구수는 53,000여명이고, 곡산강씨의 인구수는 29,000여명에 이르는 대체로 희귀성이었다.
대부분 지자체에는 지역 출신의 역사인물을 선정하여 추앙을 하고 있는데, 보령 지역 출신의 강순장군의 행적 또한 연구하고 재발견하여 지역주민의 긍지가 되도록 하는 조그만 노력도 필요한 때이다.
소규모 씨족의 힘이 부친다면 지자체에서라도 도움을 주어 자랑스러운 이 지역 인물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 제 58편 ; 보령 산수동 소나무 연계)
2. 강순장군 묘
* 위치 ; 보령시 미산면 도흥리 산 26 (입구 ; 미산면 도흥길 108-2)
강순장군(1390~1468)의 본관은 곡산이고, 자는 태초(太初)이며,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윤성(允成)의 증손이다. 1450년(문종1)에 조전절제사로 박천으로 나가 북방 방어에 힘을 썼다.
1453년(단종1)에 판의주목사를 역임하고, 1458년(세조4)에 첨지중추원사로 중앙으로 복귀를 하였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0년 여진정벌에 참여하여 종성절제사가 되고, 이후 5년 정도를 북방 방어에 힘을 쏟게 되면서 세조의 신임을 받게된다.
1467년 함경도 쪽의 호족 세력 이시해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북장군으로 임명되어 어유소, 남이 등과 함께 반란군을 격파하였고, 그 공으로 정층출기포적개공신 1등이 되어 우의정으로 승진한다.
1468년 신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으로 임명이 되었으나 유자광의 무고로 일어난 남이장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수 세기가 지난 1818년(순조18) 우의정 남공철의 건의에 의하여 누명이 풀리고 관직이 복원되었다.(다음 백과 참조)
강순과 남이는 북방에서 이시해의 난을 함께 평정하고 여진족을 물리치는 데 함께 하였다.
그러나, 유자광이 남이를 모함하여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들의 사이는 운명이 엇갈리고 만다. 예종의 앞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는 국문을 받으면서 남이가 예종 옆에서 국문을 거들고 있던 영의정 강순을 바라보며 강순과 함께 역모를 꾀하였노라고 고변하게 된다. 젊은 남이장군은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무고를 위해 충언을 해주지 않는, 생사고락을 같이 한 나이 많은 강순에 대한 서운함에 그렇게 답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로 불행하게도 강순장군도 남이장군의 역모에 몰리어 함께 사형을 당하게 된다.
@ 2023년 12월 10일 병목산을 등산하는 중 답사해보니 묘 둘레로 원형 철조망이 둘러처져 있다. 산짐승들의 피해가 발생하는 모양이다. 도로옆에 설치되었던 묘소 안내판도 떨어져 없어진 것이 보였다. 후손들이 잘 보존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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