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보령댐에서 주산쪽으로 가다가 삼거리에서 미산 쪽으로 약1.6km 정도 달리면 우측으로 서짓골 성지가 있다.
서짓골 성지는 오천의 갈매못에서 병인년(1866년) 3월 30일 처형당한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오메르트 베드로 신부, 루카 위앵 신부, 요셉 장주기 성인의 시신을 이 지역 신자들에 의해 남몰래 수습이 되어 이곳에 안장을 시킨 장소이다.
갈매못 사건은 천주교에서 병인군란(丙寅窘難,병인교난)이라 불리는 1866년의 박해 사건으로 조선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으며, 당시 약 8천 명에서 2만 명에 이르는 교인들의 순교로 전국이 피로 물들었고, 대외적으로는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천주교에서는 오천의 갈매못과 서짓골을 성역화하고 순례길을 조성하여 성인들의 발자취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다. (제22편 ; 천주교 성지 갈매못 순교터 참조)
원래 갈매못에서 이곳으로 시신을 옮기는 과정은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배편을 이용하여 해로를 따라 보령 앞 바다를 경유하여 웅천천을 따라 완장포구까지 옮기었다. 그 당시에는 웅천천의 수량이 풍부하여 읍내가 있었던 웅천까지의 수로 이용이 가능하였다. 어느 학설에 의하면 백제 말 백강(白江)의 위치가 웅천천으로 보는 이도 있고, 무량사의 큰 절을 짓기위해 건축자재도 이 수로를 이용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당시까지만 해도 웅천천은 제법 수량이 풍부하여 조수를 잘 이용하면 충분히 서짓골에 가까운 곳까지 수로운반이 가능했다고 본다. 완장포구에서부터 서짓골까지는 인력으로 사람 눈을 피해 밤을 이용해 산길로 옮겼으리라 짐작된다.
순례길은 해로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갈매못에서 대천방조제를 지나 동대동 성당과 이어니재를 경유하여 서짓골까지로 연결되어 있다.
벗꽃이 만개한 보령호의 풍광이 천주교 성지의 주변을 포근히 감싸 안으며 더욱 아릅답게 꾸민다.
2. 서짓골 천주교 성지
* 위치 ;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438-2
병인치명성인4위(丙寅致命聖人4位)의 유해가 여기 안장되었다.
성 안토니오 다블뤼 치명주교(安敦伊 致命主敎), 성 루카 위행 치명사제(閔 致命司祭), 성 베드로 오메르트 치명사제(吳 致命司祭), 성 요셉 장주기 회장 치명자(致命信者 張周基 會長)
이 분들은 갈매못에서 성 루카 황석두 회장과 함께 1866년 3월 30일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치명하였다.
서짓골에 살던 이화만(李化萬) 바오르의 가족 등 신자들이 네 분의 유해를 갈매못 인근 야산에 임시 암장하였다가, 그 해 7월 25일(음력) 여기 안장하였다. 삯배를 이용하여 바닷길로 웅천 완장포에 당도한 후 산길을 통하여 여기 안장하기까지 12일간의 비장한 운구 작업을 완수한 그들 또한 체포되어 서울(漢陽)에서 그해 가을 치명하였다.
그들의 용감한 신앙 행위로 말미암아, 여기 위대한 네 분의 치명 성인을 오늘 우리가 기릴 수 있다.(서짓골 성지 안내판 발췌)
여기 서짓골에 16년간 안장된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오메르트 베드로 신부, 루카 위앵 신부, 요셉 장주기 성인의 거룩한 육신은 이곳의 진토 되어 사성제대(四聖祭臺)가 되었다.
그 유골 일부는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에 12년간 봉안 후 한국에 반환 되었다.
그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이곳 서짓골의 안장지에서 출토한 돌을 오우라 성당에 기념비로 세웠다. 이에 대전교구장 라자로 유흥식 주교와 나가사키 대교구장 요셉 타카미미츠아키(高見三明) 대주교는 서짓골의 면례기념비 건립을 명하였다. 2016.11.11 (서짓골 순교성인4인 면례기념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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