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들어가며
조선시대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전국 각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를 구축하였다.
충청도는 서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를 '이인도'라 칭하고, 부여-홍산-한산,서천 그리고 비인-남포, 공주-정산을 연결하여 9개 역을 관장하였으며, 서북부 지역에 '금정도'라고 칭하는 도로망을 청양-결성-홍주-보령-해미-서산-태안, 그리고 청양-대흥으로 8개 역을 관장하였다. 각 역에서는 파발마를 관리하여 공무로 이동하는 관원들에게 말을 빌려주어 빠른 시간에 전국을 연결하는 정보망을 구축하였다.
여기서 현재의 보령지역에는 이인도의 남포 남전역이, 금정도의 보령 청연역이 소역(小驛)에 해당되어 연결망의 한 축이 되면서 각 역마다 소로(小路)로 연결 되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다산 정약용은 1795년 7월 금정도의 중심역의 수장인 금정찰방으로 부임을 해와 용곡역에서 1795년 12월까지 약 5개월 간 근무를 하면서 시간을 내어 영보정과 오서산 등정을 하였다.
이 때에 청라동을 거치면서 어느 길로 이동을 하였는지를 궁금하여 기록을 다시 한 번 훓터 보고 지도를 보면서 그 길을 추적해 보고 금정도의 용곡역과 보령의 청연역간의 소로를 추적해 보았다.
다산 정약용은 1795년 8월 12일 충청수영성을 방문하는 길에 청라동 석문에 들러 진사 신종수와 함께 가려 했으나, 신종수를 만나지 못하고 청소의 성현리 용못을 거쳐 충청수영으로 갔으며, 다음 날 뒤 늦게 소식을 듣고 찾아온 진사 신종수와 한산사 앞바다에서 뱃놀이를 하며 영보정 유람을 마치고 8월 14일 근무지로 돌아간다.
이 때의 길은 금정역(용곡리)-수정리-화암교회-화암저수지-구막진골-우수고개-장현리 귀학송-현원(우수현원)-아랫장밭 사거리-마쟁이 고개-내현천길-청라중교-석문의 길로 걸었다고 본다.
그 근거로는 첫째, 우수고개는 보령과 청양,광시,홍성을 잇는 주요한 통로로서 고개 입구에 고을에서 운영하는 우수현원(峴院)이 숙식을 제공하는 등 주막의 역활을 하였다. 둘째, 오서산의 주 능선이 동북 방향으로 길게 뻗어 예산쪽으로 나가 있기에 능선을 피해 낮은 고개를 찾자면 남서쪽 방향으로 낮은 고갯길을 돌아 비켜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셋째, 화성을 통해 스므티고개를 넘어 청라동에 들어설 수가 있는데, 스므티는 본래 소나무가 우거진 고개로 조선시대에 산도적의 출몰이 잦아 행인이 스무명은 되어야 무사히 넘을 수 있는 고개였다고 해 위험한 고갯길이였다.
금정찰방으로 있었던 다산은 말을 탓겠지만, 그를 수발하던 수인들은 도보로 움직였을 터이니 이 길을 개략 환산 해보면 15.1km로 4시간 거리이다.
신진사를 만나지 못하고 성연리 용못으로 출발 하는데, 용못 또한 청라동과 보령,광천을 잇는 주요도로로서,청연(淸淵)이라고도 불리면서 넙티고개를 오가는 행인들을 위하여 주막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석문-청라중교-내현천 길-마쟁이 고개-아랫장밭 사거리-황룡2리 마을회관-신광교회-황룡2저수지-넙티고개-산촌문화회관-용못(청연) 까지의 거리는 약 9.2km로 2시간 20분 가량 걸린다.
청연에서 충청수영성까지는 약 11.8km로 도보로 약 3시간 걸리는 평지이다.
이렇게 볼 때에 다산은 청라동을 경유하여 수영성으로 가는데 36.1km로 90리 길, 9시간 20분 걸리는 길을 하루 온종일 걸었다고 본다. 물론 수하들도 말을 함께 탓었다면 시간은 꽤나 줄였을 수 있다.
1795년 9월 3일 석문의 신진사로 부터 함께 오서산등정을 하자는 요청에 의해 말을 타고 성당촌(성연리 용못)에서 신종수와 만나는 두번째 청라동 방문이다.
이 길은 금정역(용곡역)-우수고개-현원-가랭이재-서낭당재-황룡2저수지-넙티재-용못을 경유하는 길로 13.6km이며 도보로 3시간 30분이 걸린다.
금정도의 각 역마다 소로(小路)가 형성 되어 있으므로 용곡역에서 금정도역승에 딸린 보령 관할 청연역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본다. 청연역의 위치는 주포면 관산리로서 관촌, 역말, 역촌 등의 지명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 관원이 말을 타고 넘어다니던 고개를 역티라고 부른다. 역말은 지금의 보령주포 농공단지와 아주대학 인근 주포면 관산리 172-5번지 부근으로 이 곳이 보령현 관할 소역(小驛)인 청연역이 있었던 곳이다.
용소에서 청연역 까지는 용못-성연저수지-진죽천길-정전리 마을회관-동남삼거리-주포우체국-원당골-아주대학-역말 까지로 약 9.1km이며 도보로 2시간 20분이 걸린다.
그렇게 볼때 금정도의 주역인 용곡역에서 보령의 청연역 까지는 22.7km로 약60여리로 도보로는 6시간이 걸린다. 요즘의 경주마가 1시간에 70 km를 달린다고 하니, 조선시대 파발마의 속력을 현재의 경주마 절반으로 친다고 해도 용곡-청연역은 1시간 채 못걸리는 거리임을 알 수 있겠다.
이렇게 조선의 도로망은 각 역들과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정보통신을 중앙으로 전달 할 수 있었다.
2. 역원(驛院, 2020.10.29)
남포현에는 이인도(利仁道) 소속으로 남포역(주산면 창암리)에 있었다. 역원 조직은 대마 2필, 기마 3필, 복마 5필, 역노 45인, 비 50인으로 운영하였다.
輿地圖書/忠淸道/藍浦/驛院
藍浦 在縣南三十里佛恩面 利仁所屬大馬二匹騎馬三匹卜馬五匹奴四十五口婢五十口
인근 역으로는 북쪽 보령현에 金井道 소속의 청연역(靑淵驛, 주포면 관산리)이 운영되었다.
원(阮)은 출장 가는 관리의 숙식과 공용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각 要路나 인가가 드믄 곳에 시설한 속칭 官집이다. 원을 관리하기 위해 공민왕 때부터 阮位田을 주었다. 1445년(세종27)에는 그 부근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서 阮主로 삼고 이를 관리하게 하였고, 경국대전에 의하면 원주에게 大路에서는 1結35負, 中路 90負, 小路 45負를 주어 원을 유지하게 하였다.
현재의 보령시에는 7개소의 원이 운영 되었는데, 藍川阮(주산 창암리 장촌), 橫川阮(미산 개화리), 寶阮(縣東三十里), 葛頭阮(대천동 갈머리), 靑蘿阮(청라 나원리), 渭水峴阮(청라 장현리)이다. (보령문화 제20집, 2011)
@ 금정도의 용곡역이 있었던 용곡리 (다산 정약용 사적비)
@ 금정찰방 부근에서 바라 본 오서산
@ 보령쪽에서 바라 본 우수고개
@ 화성 쪽에서 바라본 우수고개
@ 우수현원 터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130-4 (옛 원터가든 자리))
@ 청소면 성연리 용못(淸淵)
@ 보령 청연역 터 (주포면 관산리 172-5, 역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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