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01편 ; 청라농공단지조성 터 유적발굴 조사

푸른나귀 2020. 9. 29. 18:11

  1. 들어가며

 

     올해 초 4월부터 청라면 내현리에 들어설 농공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전 유적발굴 조사작업이 전문기관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수시로 황룡리의 농막을 오가면서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보다가 며칠 전, 작업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고 그곳을 방문하였다.

  관계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에서 청동기 시대로 추정이 되는 움집의 흔적(일명 돼지코라 불리는 움집의 기둥을 박았던 흔적과 화덕을 설치하였던)과 가마터, 각 시기마다의 분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올해 연말에 학술조사의 결과를 발표할 것이라니 자세한 것은 자료집을 받은 후에나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주변의 관창공단 조성시에도 많은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 되었고, 최근 명천동 아파트 단지 조성공사시에도 약 5만년전의 구석기시대의 유물을 비롯한 신석기시대의 환호, 그리고 청동거울 등이 발굴 되었었으니 바닷가에서 약 이십여리 떨어진 청라동에도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본다.

 더군다나 청라동으로 들어서는 궂고개 아래의 고인돌은 이지역에도 청동기시대에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한 부족들이 터를 잡아 서로 부족간에 교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청동기 시대는 대체적으로 서기전의 단군시대로 한(漢)나라로부터 철기가 도입하기 전이니 최소한 2~5천년 전의 일이된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던 려말선초의 이땅에서 활동하였던 김성우장군의 역사적 사실도 5백년 전의 일이지만, 전설이라는 신화속에 묻히고 마는게 현실인데, 몇 천년전에 살았던 이지역 토속인들의 발자취를 볼 수 있음은 행운이다.

 

  50년 만에 고향땅으로 회귀하여 선인들의 발자취에  내 발자국을 얹어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서 지금의 시대만큼의 시간이 다시 흘러 미래의 내 후손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아니 현재가 한참 후 과거가 된 뒤에 이시대를 헤쳐나간 사람들을 어떻게 기억할지?  의구심이 든다.

 그 모든 흔적이 사라진다 해도 그 뿌리는 면면이 이어질 것이다.

 내현리 분묘에 묻혀있다 이제사 햇빛을 보게된 백골의 유골과 나의 유전인자가 얼마나 동일한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 유골의 주인공의 발자욱과 내 발자욱이 어느 길에선가 일치 하였을 것이고, 이땅의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람을 함께 하였으리라는 인연의 끈을 이어본다.

 

 발굴조사연구가 끝나고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이 이 지역민들의 자산이 되어 잘 보전이 되었으면 한다.

 

 

2. 위치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내현리 36-2번지 일원

    

 

 

@ 발굴이 진행중인 논공단지 전경

  @ 도기를 굽던 가마로 추정되는 터

  @ 백골이 남아 있는 분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