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99편 ; 남포 여늬재의 경찰묘역과 보도연맹 희생 터

푸른나귀 2020. 4. 19. 17:22

 

1. 들어가며

 

 보령에서 웅천으로 21번 국도가 신설됨에 따라, 여늬재의 경찰묘역 앞을 지나던 구도로가 없어지는 바람에 요즈음은 눈길 줄 일없이 쉽게 지나치곤 한다.

 어쩌면 향토사에 관심을 갖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고 자료를 접하다 보니, 보수와 진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극과 극으로 점철되는 현실 정치에 회의를 느끼면서, 과거의 이념에 의한 점철된 회색빛 흔적을 피하려고 무심하게 여늬재를 지나치곤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 남포현의 치소는 원래 웅천읍 수부리 수안마을에 있었다. 세종 때 치소가 현재의 남포읍성으로 옮겨진 것이다. 지금도 웅천을 '남포', '원남포', '고남포'라고 동네 노인들은 말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남포라는 지명은 신라시대(750년경)에 붙여졌으니 1,300여년 전의 일이다.

 여말선초 왜구의 침입으로 조정에서 연해안을 방비하기 위해 새로운 성곽을 쌓은 것이 남포읍성인데, 그 시기가 대체로 세종27년(1445년)이므로 '고남포'를 버리고 치소를 옮긴 것도 그 시기가 될 것이다.

 

 수부리 고남포에서 현재의 남포읍성으로 왕래하는 길은 잔미산과 봉화산 사이 고갯길과 지금의 여늬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여늬재는 이어니재라고도 불리는데, '여늬'라는 말은 '여느'라는 '보통의', '예사로운', '그 밖에 다른'을 뜻하는 말로 '여늬재'는 보통의 일반적인 고개라는 어원을 갖는다고 한다.

 

 그 보통의 고갯길에서 50년대 한국전쟁시 북한의 남침으로 인하여 좌익과 우익의 갈등 속에서 있어서는 안될 사건속에 피눈물이 되는 특별한 고갯길이 되어 버렸다.

 공산군과 자위대원에 의해 포로가 된 경찰관들을 이 여늬재에서 총살 당하였다. 또한, 군과 경찰, 우익단체들에 의해 좌익으로 판단되는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분류과정도 없이 이 고갯길에서 학살하는 비인륜적인 행위가 이루어졌다. 남포에서 웅천으로 넘어가는 여늬재 골짜기에는 이런 좌우익의 비극이 숨겨져 있다.

 '만세보령 지킴터'는 보령경찰서와 지자체에 의해서 추모행사가 매년 진행되고 있으나, 그 옆에 '국민보도연맹 사건 터' 안내판의 초라함이 혹여나 억울하게 죽어갔을 고귀한 생명의 원혼들이 여늬재 골짜기에서 방황하지는 않으려나 하는 애처로움이 곁들여진다.

  좌우의 정치적 대립도 인간사가 먼저다. 지금의 시기에도 이념에 대한 긍지도 좋지만, 서로의 이념도 배려로 감싸안을 수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본다. 

  

 

2. 순국 경찰관의 묘역과 보도연맹 학살 터

 

    * 위치 ; 보령시 남포면 옥서리 450-9 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불과 몇일 안되어 7월 초순 보령지역이 공산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된다. 보령경찰과 천안 철도경찰대원은 장항으로 후퇴 하였다가 비인에 집결하여 공산군을 주산에서 방어하기로 하고 작전에 돌입한다. 천안 철도경찰대가 선봉부대로 주산으로 들어왔으나 이미 주산에 들어와 잠복 중이던 인민군 6사단의 기습을 받아 6명이 전사하고 1명은 총살, 9명이 포로로 잡히게 된다.

 포로로 잡힌 9명 또한 웅천 자위대원에 의해 감금과 고문을 당한 후 여늬재에서 총살 당하였다.

 남포에서 웅천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여늬재인데 그곳에 2007년 경찰묘지를 세우고 보령지역에서 전쟁당시 순직한 경찰들을 위해 '만세보령지킴터'로 명명하고 경찰의 날, 현충일 등에 보령시와 보령경찰서에서 참배행사를 거행한다.(보령문화원 자료 참조)

 

 아이러니하게도 여늬재 경찰묘역 바로 옆에 초라한 입간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보령지역에서 일어난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현장이기도 하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현장임을 고시하고 있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이란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경까지 군 정보국과 경찰, 헌병, 우익청년단들에 의해 소집, 연행, 구금된 후 구금자들에 대한 심사, 분류작업도 없이 곧바로 학살이 이루어진 사건으로 예비검속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의 최상층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이 된다.

 보령 국민보도연맹의 사건도 1950년 7월 초 경찰에 의한 예비검속에 최소 백여명이 보령농협 창고에 수용 되었다가 후퇴를 하던 군경에 의해 분류과정의 재판도 없이 억울하게 희생이 되었다고 한다.(제28편 ; 보령경찰서 망루 참조)

 

 

3. 참고자료

 

  한국현대사에 있어 민간인학살의 근원이 일제시대에 있다는 논거를 읽었다.

 민간인 학살은 일제가 간도에서 행한 공비토벌 전술과 조선인을 황국신민화 하는 과정에서 근원이 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행하여진 보도연맹사건이나 지리산일대에서 이루어진 '건벽청야' 전술의 토벙작전과 초토화 작전 등에 그대로 이어받아 발전시킨 일제의 잔재로 청산을 하지 못한 우리민족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후세들이 이를 규명하고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주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2021년 8월)

 

  한국 현대사에서는 두 가지 건드려서는 안되는 금기가 있었다. 하나는 친일파 청산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민간인 학살이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은 서로 분리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에서 최대규모인 보도연맹 집단처형, 크고 작은 집단학살을 숱하게 낳은 '공비토벌' 전술, 그리고 학살의 주체로 등장한 군과 경찰, 청년단에서는 일제의 잔재가 짙게 뭍어난다.

  일제는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을 제정한 것을 시발로 사상범들에 대한 감시를 법제화하였다. 이어 일제는 1938년 7월 사상전향자들로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을 결성했으며,  다시 1941년 1월에는 사상보국연맹을 대화숙으로 개편하였다. 대화숙은 일본정신의 현양과 내선일체 강화 및 전향자의 선도 보호 등을 주요사업으로 삼고 전향자들을 입숙시켜 군대식 기율로 관리하면서 황민화 교육을 실시 하였다. 이어 1941년 2월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제정하여 재범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는 사상범들을 예방구금소나 감옥에 가수용할 수 있는 길을 텃다. 대화숙 등에 수감되었던 사상범들은 소련군의 대일 참전과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서둘러 항복했기에 살아났다. 만일 2차대전의 종전이 늦춰졌거나 한반도에서 전투가 일어났다면, 일제가 이렇게 알뜰하게 관리해온 사상범들을 그대로 두었을리 만무하다.

 평시에 사상범을 철저히 '관리'하다가 유사시에 '처리'한다는 일제의 숨은 계획은 불행히도 대한민국에 계승되어 한국전쟁 때 실천에 옮겨졌다. 1949년 6월 검찰과 경찰 요인들의 주도하에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은 남로당이나 민애청 등 좌익계열의 정당 및 사회단체 성원이었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대상으로 삼았다. 관의 개입에 의한 강제전향 역시 일본과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제도로 대표적인 일제잔재였다.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와 공산주의 박멸을 기치로 내건 보도연맹에의 가입은 사실상 의무사항이었다.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확실히 충실한 국민이 되었다는 것을 보증하는 장치였던 보도연맹에 가입한 전향자들의 수는 약 30여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들 '충실한 국민'은 대부분은 전쟁이 발발하자 국가기구에 의해 조직적으로 소집이 되어 철저히 '처리'되었다.(대한민국사01편, 한홍구, 한겨레출판, 2009,131~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