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185

제124편 ; 홍성 사운고택

1. 들어가며 서해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고향과 서울을 오가는 길을 화성에서 예산까지의 619번 지방도를 주로 이용하였다. 예산을 거처 645번 지방도를 통하여 인주를 거치고, 아산방조제를 지나 평택에 들어서는 이 길은 여간 막히는 것이 아니었으나 그 길만이 귀경하는 외통수 길을 비켜 올라갈 수 있어 한참동안이나 이용하였다. 이제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왠만하게 뚫리어 619번 지방도를 달리는 일이 없어졌는데, 모처럼 이 길을 달리면서 눈길을 주었던 곳곳이 변하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년전 가을인가 총동창회 플랭카드가 휘날렸던 장곡초등학교 반계분교는, 언제 폐교가 되었는지 썰렁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보게 되니 헛헛한 느낌이 온몸으로 전율이 되어 감기는 것 같다. 이 619번 지방도는 조선시대에는..

제123편 ; 미산 평라리 선사 유적

1. 들어가며 보령댐이 수몰되기 이전에 그 그 지역의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충북대, 이화대, 공주대를 중심으로 협력 발굴작업이 이루어졌었다. 주요 유적지로는 평라리를 중심으로 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유적과, 용수리를 중심으로 한 천방사지 유적과 도요지 발굴이 중심이 되었다. 평라리 선사유적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멀리는 기원전 6세기경까지 올려볼 수 있는 흔적으로 이 지역에 고조선시대에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용수리의 천방사 절터 유적은 양각산 아래 천개의 방을 가진 절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에 알수 있을 듯이 백제 후기에 세워진 성주사와 함께 절의 세력이 상당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곳에서 나온 기와편과 도요지에 의해 이 절이 고려시대(영흥사)를 거쳐 조선시대에까지 번영을..

제122편 ; 잔미산 봉수대

1. 들어가며 옥미봉 봉수대지를 답사하기 전까지는 몇가지 잘못 된 인식을 하였었다. 남포면 읍내리에서 성주면 개화리로 넘어가는 말재(馬峙)를 경유하여 봉화산에 오르니, 봉화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을만한 지리적, 지형적인 환경이 아니었다. 정상 부위가 너무 협소하고 외부를 전망하기에는 부적당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산행길을 재촉하였는데, 봉수대의 위치는 잔미산 정상에 위치함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옥미봉 봉수대지(玉眉峯 烽燧臺地)'라 명기 된 기록을 보면서 옥미봉(玉眉峯)을 옥마봉(玉馬峯)과 같은 지명으로 생각하고, 대부분 봉수대가 위치한 지명이 봉화산,봉수산,봉대산 등의 이름으로 남아 내려오기에 옥미봉 봉수대를 봉화산에 있을 것으로 짐작부터 인식을 하여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잔미산은 해발 417..

제121편 ; 미산 아미산 중대암

1. 들어가며 용수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용암부락(龍巖部落)과 수현부락(水絃部落)이 통합되어 불리게 되었다. 용암(龍巖)이라는 지명은 양각산 줄기에 서 있는 용바위에서 유래 되었는데, 옛날에 동굴에서 나온 용이 승천을 하였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웅천천을 중심으로 건너편 마을의 지명이 수현(水絃)인데 아미산 줄기를 따라 위치한 부락으로 산세에 의해 물이 풍부하여 부락명을 수현(물줄)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수현(水絃)이라는 이름은 염뜸마을에 남아 있는 파주염씨 사당의 이름이 수현사(水鉉祠)로 남아 있다. 용암마을이나 수현마을이 보령댐의 수몰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져 인물도 사라지고 지명도 사라질까 걱정이 된다. 아미산의 장군봉 아래로 골짜기가 깊은데 이곳에 상대, 중대, 하대암이 자리하고 있다. '..

제120편 ; 미산 박승건, 박세주 정려각

1. 들어가며 도화담 삼거리에서 외산면 쪽으로 조금가면 왼쪽으로 산 아래 정려각이 있다. 대부분의 정려각이 한 칸 정도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곳은 정면 두 칸에 측면 한 칸으로 제법 잘 보존되고 있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교 국가였기에, 특히나 충효에 대하여는 백성들에게 인간의 근본임을 강조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는 지역 유림들의 상소에 의해 효자 ,열녀에 대한 정려각이 나라에서 하사되어 마을 입구에 세워지는 일들이 많아졌다. 박세주는 아버지가 용인군수로 있을 때 지병으로 고생을 하게 되자, 열세살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임지로 가 병수발을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와 마주 앉은 아버지가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날 밖으로 나와 대나무밭을 돌아다니며 죽순을 찾아 보았지만 구..

제119편 ; 주산 주렴산 기미독립만세 기념비

1. 들어가며 주렴산을 올라보니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시기에 일제의 핍박에 떨쳐 일어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즈음 서울에서 활동하던 지식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서 불을 지폈었다. 우리 고향에도 산봉우리에서 만세운동을 하였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성태산의 만세봉과 환산의 만세봉, 주렴산 국사봉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당시 대부분 오일장이 서던 장날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에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추진 하였으나, 왜경들의 감시가 심하여 산꼭대기로 올라가 횃불을 들고 소리를 쳐 주민들의 호응을 얻고, 왜경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식의 시위운동을 추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국권을 빼앗기고 고종의 국장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만세운..

제118편 ; 주교 봉대산 봉수대

1. 들어가며 조선시대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전국 각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를 구축하였다. 충청도는 서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를 '이인도'라 칭하고, 부여-홍산-한산,서천 그리고 비인-남포, 공주-정산을 연결하여 9개 역을 관장하였으며, 서북부 지역에 '금정도'라고 칭하는 도로망을 청양-결성-홍주-보령-해미-서산-태안, 그리고 청양-대흥으로 8개 역을 관장하였다. 각 역에서는 파발마를 관리하여 공무로 이동하는 관원들에게 말을 빌려주어 빠른 시간에 전국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구축하였다. 여기서 현재의 보령지역에는 이인도의 남포 남전역이, 금정도의 보령 청연역이 소역(小驛)에 해당되어 연결망의 한 축이 되면서 각 역마다 소로(小路)로 연결 되어 있었다.(제100편 ; 다산의 발자취로 본 '금정도' ..

제117편 ; 남포 경순왕 경모전

1. 들어가며 대천역에서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대해로를 따라 4.5km를 가면 좌측으로 남포면 제석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마을길을 천천히 달리다보면 좌 우측으로 장승들을 세워 놓아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듯 하다. 하지만 이곳도 도심의 물결이 스며드는지 주택의 형태가 농촌의 이미지를 벗고 현대적으로 변하여 가고 있는 듯 하다. 큰도로 마을 입구에서 약 1.2km 정도 들어오면 '경순왕 경모전 입구'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그 농로길을 따라 약간 들어서면 스러져 가는 장승과 임도의 차단봉이 보인다. 시멘트 포장길의 경사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가려진 솟을 대문이 보인다. 나즈막한 돌담으로 둘러쳐진 경모전은 하단부 주차장에서 한참 올려다볼 수 있듯이 ..

제116편 ; 웅천 구룡리 돌방무덤

1. 들어가며 이어니재를 넘어 웅천으로 들어서며 다리를 건너기 전 우측으로 개천길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웅천돌문화공원이 나온다. 그 입구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집성당을 들르고 돌문화공원의 산책길을 따라 시비(詩碑)에 쓰인 글을 음미하면서 걷고 있었다. 석재 전시실을 지나 정자 쪽으로 발길을 하는데, 우측 잔디언덕으로 돌무덤의 표지판이 있어 다가가니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유물이 복원되어 있었다. 표지판의 원소재지를 보니 구룡리이다. 구룡리에 확장 조성되고 있는 웅천산업단지로 인하여 이곳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여 설치한 것 같다. 화락산 줄기를 등에 업고 노천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실분과 비슷한 형태의 돌방무덤을 한 구룡리 석실분도 백제 시대에 이곳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지방 호족세력이 웅천천의 넓은 경작지를 기..

제115편 ; 웅천읍 집성당(集成堂)

1. 들어가며 웅천읍 대천리 웅천초등학교 옆으로 하천을 따라 500여 미터를 가면 화락산의 동쪽 사면에 집성당(集成堂)이 있다. 집성당은 구한말 서원철폐, 강화도조약 등으로 조선사회의 유교적 가치관이 쇠락해지자 경기도 양주군 장흥에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그리고 우암 송시열의 학문을 계승한 삼희당 윤석봉(三希堂 尹錫鳳)이 1888년 충청도 비인으로 재종숙 윤건오(尹建五)와 함께 가족을 데리고 낙향하였다가 1890년 웅천의 화정으로 이주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호서지역의 남당학파와 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세우게 된 사우(祠宇)이다. 1898년 3월에 삼희당 윤석봉의 주도 하에 보령 지역과 서천, 홍성, 청양, 부여 지역의 유림들의 지원아래 세워졌으며, 창건에 앞장 선 이들로는 율농 신섭(栗農 申섭)과 돈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