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190

제129편 ; 백제부흥운동의 흔적기행(2, 홍성의 학성)

1. 들어가며 몇 해전에 봉수산의 임존성(제29편; 백제부흥군의 정기 어린 임존성, 2019.4.1)을 답사하였으나, 오서산의 '도독의 성'이 백제부흥운동의 일환으로 축성되었을 가능성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아 보았다. 백제가 멸망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백제의 유민과 왜와 연합한 부흥군과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치열한 전투를 치뤘던 주류성의 위치가 인접한 홍성의 학성산성이라는 설에 그곳을 답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두루미城 =두루성=鶴城 =周留城'이라는 논리에 어느정도 일치 하는지 궁금하기도 해 발길을 재촉 하였다. 학성의 위치는 사운고택 뒷편 산으로 지방도 619번과 지방도 96번이 교차하는 장곡면 산성리에 위치한다. 지리적으로 부여나 공주에서 예산이나 당진쪽으로 지나가는 조선시대의 '금정도'가 중..

제128편 ; 백제부흥운동의 흔적기행(1)

1. 들어가며 오서산 중턱에 위치한 '도독의 성'이 백제부흥운동시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인식하고는 주변의 백제부흥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서천의 금강입구에는 기벌포 1,2차전으로 백촌강 전투를 설명하고 있고, 예산 봉수산의 임존성은 백제부흥운동의 주력 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어 금강하류와 임존성에서의 항거가 당연하다고 인식해 왔는데, 좀더 살펴보니 위치비정에 이론(異論)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일본의 학자와 그를 계승한 학자들 사이에 부흥운동시 항전의 장소로 주류성의 한산설(건지산성)과 백촌강의 금강하류설이 우세하였으며, 주류성을 부안 변산반도에 있는 위금암산성이며 백촌강은 동진강이라는 설, 그리고 김정호의 대동여지에 의한 홍주읍성이 주류성이라는 설, 그리고 향토사학자에 의한 보령의 웅천천을 백강..

제127편 ; 청라 신산리 고인돌

1. 들어가며 예전에 청라에 남아 있는 고인돌을 답사하면서 (제110편 ; 청고을에 남아 있는 고인돌 참조) 신산리 고인돌은 가까운 곳에 있어서 답사를 차일피일 미루게 되어 한 해가 지나가게 되었다. 그 글에서 대보문화 6집을 인용하여 ≪ 신산리 고인돌 ; 청라면 신산리 143-3번지의 서북쪽 끝 도로변에 1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곳은 낮은 구릉의 말단부로 구릉과 평지가 접하는 곳이다. 해발고도는 110m정도이지만 주변과의 차이는 3~4m밖에 되지 않는 언덕이다.≫라고 간략하게 설명하였었다. 대부분의 고인돌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들판에 널브러저 잡목속에 덩그러니 있으려니 생각하며 인터넷 지도를 로드뷰로 검색하여 보니 이곳 또한 잡목과 풀섶으로 뒤덮여 있음을 확인하고 늦가을 낙엽이 지면 찾으리라 마음을 ..

제 126편 ; 미산 보령댐 애향 박물관

1. 들어가며 청천저수지를 상수원으로 하던 보령지역의 수원지를 광역화하여 내포지역을 아우르는 급수난과 공업용수를 해결하기 위해 1990년부터 1998년 까지 보령댐을 건설하였다. 성주산의 깊은 계곡과 아미산과 양각산으로 감싸안은 형국의 지형은 백제시대부터 서해바다에서 백제도성으로 통하는 주요한 길목으로 통일신라시대 성주사로 향하는 믿음의 길이기도 하였다. 웅천천을 따라 뱃길이 댐이 설치된 곳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상류쪽으로는 달구지를 이용하여 협로를 통하여 성주와 무량, 그리고 홍산,부여, 공주로 교류가 이루어졌으리라 본다. 양각산과 중매산의 협곡을 막아 보령댐을 세우면서 미산면의 평라리, 용수리, 풍계리,봉성리를 터전으로 삼고 살던 많은 이들이 고향을 버리고 떠나야만 하였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위..

제125편 주산 동오리 선돌과 고인돌

1. 들어가며 보령에서 발굴된 고인돌 중에 규모가 가장 큰 것은 동오리 선돌마을에 있는 덮개돌로 가로 775*세로 470 * 높이 180cm 정도로 무게가 개략 160톤 가량이 될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렇게 큰 고인돌을 이동하기 위해서는 청동기 시대에, 웅천천을 주변으로 한 강력한 지배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좌측 밭으로 선돌 하나가 우뚝 서있고, 우측으로 고인돌이 논 가운데 앉아 있으며 몇 기의 고인돌이 더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선돌과 고인돌에 전해지는 마을 전설에 의하면, 옛날 옥녀(갱구 할멈)가 앞치마에 바위를 싸들고 고깔모양 바위를 머리에 쓰고, 지팡이를 짚고 산을 내려오다가 치마가 찢어지는 바람에 떨어트린 바위가 마당바위가 되었으며, 고깔모양 바위는 고깔바위로, ..

제124편 ; 홍성 사운고택

1. 들어가며 서해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고향과 서울을 오가는 길을 화성에서 예산까지의 619번 지방도를 주로 이용하였다. 예산을 거처 645번 지방도를 통하여 인주를 거치고, 아산방조제를 지나 평택에 들어서는 이 길은 여간 막히는 것이 아니었으나 그 길만이 귀경하는 외통수 길을 비켜 올라갈 수 있어 한참동안이나 이용하였다. 이제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왠만하게 뚫리어 619번 지방도를 달리는 일이 없어졌는데, 모처럼 이 길을 달리면서 눈길을 주었던 곳곳이 변하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년전 가을인가 총동창회 플랭카드가 휘날렸던 장곡초등학교 반계분교는, 언제 폐교가 되었는지 썰렁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보게 되니 헛헛한 느낌이 온몸으로 전율이 되어 감기는 것 같다. 이 619번 지방도는 조선시대에는..

제123편 ; 미산 평라리 선사 유적

1. 들어가며 보령댐이 수몰되기 이전에 그 그 지역의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충북대, 이화대, 공주대를 중심으로 협력 발굴작업이 이루어졌었다. 주요 유적지로는 평라리를 중심으로 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유적과, 용수리를 중심으로 한 천방사지 유적과 도요지 발굴이 중심이 되었다. 평라리 선사유적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멀리는 기원전 6세기경까지 올려볼 수 있는 흔적으로 이 지역에 고조선시대에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용수리의 천방사 절터 유적은 양각산 아래 천개의 방을 가진 절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에 알수 있을 듯이 백제 후기에 세워진 성주사와 함께 절의 세력이 상당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곳에서 나온 기와편과 도요지에 의해 이 절이 고려시대(영흥사)를 거쳐 조선시대에까지 번영을..

제122편 ; 잔미산 봉수대

1. 들어가며 옥미봉 봉수대지를 답사하기 전까지는 몇가지 잘못 된 인식을 하였었다. 남포면 읍내리에서 성주면 개화리로 넘어가는 말재(馬峙)를 경유하여 봉화산에 오르니, 봉화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을만한 지리적, 지형적인 환경이 아니었다. 정상 부위가 너무 협소하고 외부를 전망하기에는 부적당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산행길을 재촉하였는데, 봉수대의 위치는 잔미산 정상에 위치함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옥미봉 봉수대지(玉眉峯 烽燧臺地)'라 명기 된 기록을 보면서 옥미봉(玉眉峯)을 옥마봉(玉馬峯)과 같은 지명으로 생각하고, 대부분 봉수대가 위치한 지명이 봉화산,봉수산,봉대산 등의 이름으로 남아 내려오기에 옥미봉 봉수대를 봉화산에 있을 것으로 짐작부터 인식을 하여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잔미산은 해발 417..

제121편 ; 미산 아미산 중대암

1. 들어가며 용수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용암부락(龍巖部落)과 수현부락(水絃部落)이 통합되어 불리게 되었다. 용암(龍巖)이라는 지명은 양각산 줄기에 서 있는 용바위에서 유래 되었는데, 옛날에 동굴에서 나온 용이 승천을 하였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웅천천을 중심으로 건너편 마을의 지명이 수현(水絃)인데 아미산 줄기를 따라 위치한 부락으로 산세에 의해 물이 풍부하여 부락명을 수현(물줄)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수현(水絃)이라는 이름은 염뜸마을에 남아 있는 파주염씨 사당의 이름이 수현사(水鉉祠)로 남아 있다. 용암마을이나 수현마을이 보령댐의 수몰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져 인물도 사라지고 지명도 사라질까 걱정이 된다. 아미산의 장군봉 아래로 골짜기가 깊은데 이곳에 상대, 중대, 하대암이 자리하고 있다. '..

제120편 ; 미산 박승건, 박세주 정려각

1. 들어가며 도화담 삼거리에서 외산면 쪽으로 조금가면 왼쪽으로 산 아래 정려각이 있다. 대부분의 정려각이 한 칸 정도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곳은 정면 두 칸에 측면 한 칸으로 제법 잘 보존되고 있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교 국가였기에, 특히나 충효에 대하여는 백성들에게 인간의 근본임을 강조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는 지역 유림들의 상소에 의해 효자 ,열녀에 대한 정려각이 나라에서 하사되어 마을 입구에 세워지는 일들이 많아졌다. 박세주는 아버지가 용인군수로 있을 때 지병으로 고생을 하게 되자, 열세살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임지로 가 병수발을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와 마주 앉은 아버지가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날 밖으로 나와 대나무밭을 돌아다니며 죽순을 찾아 보았지만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