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190

제139편 ; 미산 열녀 장씨 정문각

1. 들어가며 미산면사무소에서 내평리 쪽으로 약 400m 정도 가면 도로 우측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인 정려각이 늦은 시기에 건축되어서인지, 혹은 마을과 집안에서 잘 관리한 탓인지 아름답게 세워져 있다. 보령은 예부터 양반동네로 알려졌 듯이 정려각이나 열녀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이곳의 정려각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다. 특히, 미산에는 용수리를 비롯한 깊숙한 산세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쌓고 제자들을 길러낸 학자들이 많았다. 초기 성리학의 대가 이제현 선생이 이곳에 자리하였음은 그 사상들이 이곳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공자가 이상국가로 생각했던 주나라를 닮고자 사상을 구축하며 이상향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지만, 공자의 꿈은 중원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한반도로 건너..

제138편 ; 외연도 수호신 전횡(田橫) 장군

1. 들어가며 우리 지역의 섬 외연도에는 '보령 외연도 당제'를 매년 음력 2월 15일에 지내고 있다. 이 당제는 충남도 무형문화재 제 54호로 2017년 12월에 지정이 되었는데, 당제(전횡장군 사당)과 산제(산신당), 용왕제후 안당고사(마을 어귀) 순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외연도 상록수림 내에 외연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2천 여년 전 산둥반도 주변에 위치했던 제나라의 전횡장군을 풍어의 신으로 추앙하면서 위패를 모시고 있었는지 궁금하여 짬짬히 자료들을 모아보았다. 제나라를 이끌던 전횡장군이 항우와 한고조에게 패망을 하고 그를 따르던 오백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산동반도 앞의 섬(전횡도)으로 피하였다고 하는데, 결국 한고조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자결을 하게된다. 전횡도에 남아 있던 그의 ..

제137편 ; 토정선생의 자식들

1. 들어가며 '조선의 수퍼스타 토정 이지함'의 저자는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보령시 천북 출생의 이태복이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서고에 꽂혀있는 이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문구의 '토정 이지함'을 읽어본 것이 오래전의 일인데 저자 역시 이문구의 책을 여러 도서 중에 자료로 이용하여 이 책을 발간한 것이다. 토정선생이 보령의 인물임을 익히 알고 있지만, 고만에 웃대의 묘를 쓰면서 자신에게는 운이 닿지 않음을 알면서도 후대 집안의 번영을 위해 자기 희생을 치루었다. 형들의 집안에서는 산해와 산보가 조정으로 나가 이름을 떨치었으나, 자신에게는 안타까움만 후세에 전해진다. 이 책에서 토정선생 직손들의 불운했던 인생 이야기가 펼쳐저 선생이 살아가던 시대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보령의 안물 중에 ..

제136편 ; 천덕산 가교비

1. 들어가며 미산면 도흥리는초입새인 봉성리 삼거리로부터 아미산 골짜기인 백제골을 비롯해 도흥천을 따라 월명산과 천덕산으로 둘려처진 10여 리 길의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어 있다. 아마도 70년대 전 만해도 빈농을 벗어날 수 없었던 산촌이었을 것 같다. 우연히 천덕산 가교비를 답사하면서 '도흥리에 있던 한 사찰의 스님이 이 길을 개척하고 이곳에 돌다리를 놓은 뒤 비문을 새겨 두었다'라는 안내판의 글을 보고 지도를 놓고 한참이나 생각해 보았다. 불가에서 덕을 쌓는 일 중 가장 큰 것이 길을 내거나 냇가에 징검다리를 놓는 일을 큰 보시로 생각하였다. 큰돌을 옮겨 징검다리를 놓거나, 통나무를 엮어서 나무다리를 설치하는 일은 개울을 건너던 동네사람들이 모여 두레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화강암으로 교각을..

제135편; 다산의 성호 이익 추모 학술대회 흔적

1. 들어가며 다산 정약용은 1795년 7월 금정도 중심역의 수장인 금정찰방으로 좌천 부임해 용곡역에서 1795년 12월까지 약 5개월 간 근무를 하면서 기호지방 천주교계의 중심인물인 예산 출신 이존창(李存昌)을 검거하는 데 공헌을 하게 된다. 노론세력에 의한 남인세력의 견제 방법으로 천주교는 아주 적절한 구실이 되어 족쇄역활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벗어나는데에 이존창의 검거는 정약용의 족쇄를 어느정도 벗어나게 해주는 역활을 하게된 것이다. 정약용이 실현한 사상적 사고는 성호 이익선생의 실학사상에 의해 구축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다산이 직접 성호선생에게 사서를 받은적은 없으나, 그 당시 실각 되었던 기호,호서, 영남지역의 남인들은 지연,혈연관계로 노론과의 대립에서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많은 업적을 남기..

제134편 ; 오천 선림사 불상

1. 들어가며 선림사(禪林寺)는 마곡사(麻谷寺)를 본사로 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의 말사이다. 오천 소성리 도미부인사당 주차장에 들어서기 전 직진을 하면 천년고찰 선림사에 닿게 된다. 입구인 일주문에는 '오서산 선림사(烏棲山 禪林寺)'라는 현판이 달려있어 근동으로 오서산의 정기를 배후로 한 사찰임을 밝히고 있으며, 도미부인의 설화가 깃들인 상사봉 아래 오천항 내륙 깊숙히 들어온 만(灣)을 바라보며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 대웅전안 불단에는 충남 도유형문화재로 등록된 '선림사 목조관음보살좌상(禪林寺 木造觀音菩薩坐像)'과 '선림사 목조석가여래좌상(禪林寺 木造釋迦如來坐像)'이 모셔저 있는데, 조선 후기시대의 작품으로 제작자는 미상으로 불단 중앙에 모셔저 있는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우측으로 모셔진 목조관음..

제133편 ; 보령 학성리 공룡발자국 화석

1. 들어가며 인류가 경험한 빙하기로는 2만 년 전 쯤에 일어난 것으로 그때에 베링해협을 통하여 아메리칸 인디언의 조상들이 아시아대륙에서 옮겨 갔다고 한다. 빙하기에는 중국대륙과 한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었고, 서서히 온난화로 간빙기가 되면서 빙하가 물러나 해수면이 상승하게 된다. 학성리의 지층이 8500만 년 전에 형성된 퇴적층이라 연구되고, 그 퇴적층 위에 공룡의 발자국이 찍혔다고 하니 겨우 백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로선 시간의 무게를 가늠하기 힘들다. 몇 해 전, 학성리 공룡발자국 화석이 도기념물로 지정 되었다고 들었지만 물때를 맞추어야 하고, 지리적으로도 조금 떨어져 머뭇거리다가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다. 천북지역을 돌아보는 기회에 가장 물이 빠져나가는 물때를 맞추어 현지에 도착하였다. 평일이라 답사객..

제132편 ; 백제부흥운동의 흔적기행(4)

1. 들어가며 흥미를 갖고 옛사람들의 흔적을 쫒다보면 수 많은 가설들을 만나게 된다. 현재라는 시각에서 옛 사람들의 흔적을 6하 원칙에 따른 정확성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함이 따르기에 정통사학과 민족사학이 대립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저 흥미를 갖고 흔적을 찾아보는 일반인에게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럴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긍정적인 인식을 수용하게 된다. 꼭 사실이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들여다 보면 흥미를 잃게 되기에 상상의 나래를 펼 수가 없을 것이다. 백제부흥운동을 잠시나마 들여다보니 천오백 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적은 세월이 아니며, 그 시대를 살아 온 백성들의 생각들을 읽어낸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라 생각이 든다. 책으로 읽어보는 역사는 사람에 따라 시기나 위치의 비정이 서로 다르..

제131편 ; 고운 최치원선생의 유적지(장곡 마애금석문)

1. 들어가며 어린시절 내가 살던 고향의 냇가에도 작은 바위가 있었다. 온종일 동무들과 미역을 감으면서도 그 바위에 암각된 글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한 갑자 지난 근래에서야 200여 년 전에 새겨진 금석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제31편 ; 도화동 문(桃花洞 門), 2019.4.6 참조) 보령땅에는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유적으로 성주산 성주사지에 세워진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남포방조제부근 보리암 유적지가 있다.(제18편 ; 육지로 변한 보리섬(최치원선생 유적지),2018.12.30) 최치원 선생은 합천 해인사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저 있으나, 홍산의 무량사 뒷편에 뭍혔다는 설과 홍주의 쌍계계곡 주변에 뭍혔다는 이설들 등이 존재하고 있다. 그중에 홍주의 쌍계계곡에 있던 최치원 선생의 묘..

제130편 ; 백제부흥운동의 흔적기행(3, 홍성 장곡산성)

1.들어가며 오전에 학성을 둘러보고 주류성의 위치가 장곡산성이라고 하여 여기까지 온 김에 광시로 가서 갈비탕 한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대현리에 들어서 장곡산성으로 향했다. 도로변에 안전하게 차를 주차하고 마을로 들어서니 산성으로 가는 콘크리트 포장이 문지까지 경사지게 이어져 있다. 문지에 들어서기 전에 성벽에서 무너져 내린 돌덩이들이 넝쿨식물과 잡목에 가리어 얼굴을 드문드문 내밀며 내게 천 오백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말하려고 하는 것만 같다. 고갯마루엔 주류성의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660년, 백제의 사비성과 웅진성의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되자 백제부흥운동을 펼쳤던 성이다. 왜에 있던 풍(豊) 왕자를 모셔와 왕통을 잇고 주류성을 왕성으로 삼아 백제부흥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했던 곳이다. 주류성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