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39편 ; 미산 열녀 장씨 정문각

푸른나귀 2022. 3. 21. 12:39

1. 들어가며

 

   미산면사무소에서 내평리 쪽으로 약 400m 정도 가면 도로 우측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인 정려각이 늦은 시기에 건축되어서인지, 혹은 마을과 집안에서 잘 관리한 탓인지 아름답게 세워져 있다. 보령은 예부터 양반동네로 알려졌 듯이 정려각이나 열녀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이곳의 정려각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다.

 특히, 미산에는 용수리를 비롯한 깊숙한 산세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쌓고 제자들을 길러낸 학자들이 많았다. 초기 성리학의 대가 이제현 선생이 이곳에 자리하였음은 그 사상들이 이곳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공자가 이상국가로 생각했던 주나라를 닮고자 사상을 구축하며 이상향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지만, 공자의 꿈은 중원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시대의 정치, 사상 등에 전반적인 영향을 끼친다.

 정도전이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성리학으로 이끌어 갈 새로운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무인들 중 신흥세력인 이성계와 손을 잡고 역성혁명을 일으킨다. 정도전의 꿈을 이룩하기도 전에 이방원에 의해 제거 되었지만, 조선은 정도전이 바라는 방향으로 유교를 주축으로 한 새시대가 오백년을 이어갔으니 그 위업은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성리학은 조선의 이념인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역활을 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국가를 정체시키며 당쟁에 휩싸이게 하는 불행한 일도 함께 생기게 하였다.

 조선시대 이전 즉, 성종이 즉위하기 전까지도 장자우위 제도는 없었다. 모든 자녀에게 상속이란 균등하게 분배되었으며, 조상에 대한 제사 역시 형제, 자매들이 돌아가면서 지내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배우자를 잃게 되어도 재가나 재취가 그렇게 흠이 되지 않고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장자가 우선하여 조상을 모시고, 집안의 기둥으로 생각하게 되는 장자 우선제도와 여인들의 정조와 관련하여 엄하게 구속하는 사회로 변하였다.

 조선시대의 여인들이 남편을 위해 자신의 신체 일부를 끓여 간병을 하고, 젊디젊은 청춘을 평생 규중에서 보내야만 하는 삼종지도의 정서를 성리학을 근거로 양반들이 구속을 하게되는 사회가,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되어서도 그 규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그 당사자들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

 

 팔작지붕 아래 오석에 새겨진 열녀비와 현액으로 형상화 되어 추앙받는 당사자의 행적이 정려각의 아름다운 단청 속에 애처로움으로 묻어난다. 

 그래도, 동네 어귀에 세워진 정려각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효(孝)라는 근본을 생각하게 한다. 

 

 

2, 열녀 장씨 정문각

 

    @ 위치 ; 미산면 내평리 140-1

    @ 시대 ; 1929년

 

  미산면 내평리 마을에 있으며,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 지붕을 하고 있다. 내부는 비석을 세우고 현액을 걸어 놓았는데 현액에는 學生金俊培妻烈女孺人仁同張氏之門孔夫子誕降後二千四百八十年己卯四月日始旌(학생김준배처열녀유인인동장씨지문공부자탄강후이천사백팔십년기묘사월일시정)이라고 각서 되어있다.

 인동장씨는 김해김씨인 김준배의처로 남편의 병세가 심하여 차도가 없자 사람의 고기를 달여 먹어야 낫는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살을 떼어 국을 끓여 장에서 사온 소고기국이라 하며 먹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남편이 3개월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 사실을 남포군수가 알고 감탄하여 표창하고 후손들은 길이 빛내기 위해 1929년 열녀문을 세웠다.(현장 열녀 인동장씨 정문각 안내판 참조)

 

    

  @ 정려각 정면 전경 

  @ 정려각의 후편 전경

  @ 정려각 측면 전경

  @ 정려각 내 열녀비

  @ 정려각 내 현액

  @ 정문각 현장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