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38편 ; 외연도 수호신 전횡(田橫) 장군

푸른나귀 2022. 3. 17. 09:33

1. 들어가며

 

    우리 지역의 섬 외연도에는 '보령 외연도 당제'를 매년 음력 2월 15일에 지내고 있다.

 이 당제는 충남도 무형문화재 제 54호로 2017년 12월에 지정이 되었는데, 당제(전횡장군 사당)과 산제(산신당), 용왕제후 안당고사(마을 어귀) 순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외연도 상록수림 내에 외연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2천 여년 전 산둥반도 주변에 위치했던 제나라의 전횡장군을 풍어의 신으로 추앙하면서 위패를 모시고 있었는지 궁금하여 짬짬히 자료들을 모아보았다.

 제나라를 이끌던 전횡장군이 항우와 한고조에게 패망을 하고 그를 따르던 오백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산동반도 앞의 섬(전횡도)으로 피하였다고 하는데, 결국 한고조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자결을 하게된다. 전횡도에 남아 있던 그의 부하들 오백인 모두 그 소식을 듣고 자살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2천 여년 전에 외연도에도 사람이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시대 중,후기부터 이곳에 살던 섬사람들 중에 전횡장군이 부하들과 함께 피하여 살던 곳이 외연도였다는 전설을 가지고, 이 섬의 수호신으로서 풍어의 신으로 존앙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데, 기회가 있었지만 아직 현지를 답사하지 못하여 아쉽기만 하다. 

 언젠가 답사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전횡장군에 대한 자료를 모은다.

 

   중국의 역사는 주변 이민족들이 세를 키워가며 중원을 차지하는 자가 권력의 최상위층에 오르게 되는 구조이기에 왕조의 지배기간이 우리나라 왕조보다 훨씬 짧고 복잡하다. 실제로 순수 한족이 중국을 지배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 이민족들의 각축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요서땅인 산동반도는 요동땅을 아우르는 지역을 포함하여 오래 전부터 동이족의 활동 무대였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산동반도를 포함한 요서땅에 자리를 한 제(齊)나라는 한 시대만을 지배했던 나라이름이 아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제나라는 제(齊)를 국호로 하는 나라를 의미하며

 * 주나라 시대의 제는 강태공을 중심으로 하는 강제(姜齊, 기원전 1046년경~기원전379년)와 전씨의 후예가 세운 전제(田齊, 기원전386년~기원전221년)이 있었으며,

 * 전한의 제후국으로의 제(齊, 기원전203년~ 기원전110년)

 * 남조의 제(齊, 479~502)

 * 북조의 북제(北齊, 550~577)

 * 고구려 유민의 후손 이정기가 세운 제(齊, 782)

 * 황소의 제(齊, 881)로 여러 나라들이 齊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는데, 영역으로는 산동반도를 포함하는 중원의 동쪽 땅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들의 웅거집단들이었다.

 전횡(田橫)장군은 주나라시대 중원의 동쪽 땅을 기반으로 한 전제(田齊)의 제왕이었다.

 

  

2. 참고자료

 

   1) 백양 중국사 발췌

  서초 왕국이 선 지 두달 만에 다시 전쟁이 폭발했다.

  옛 제왕 전불의 재상 전영(田榮)이 맨 먼저 군사를 일으켜 지난날 동료인 새로운 제왕 전도를 공격했다. 옛 조왕 조헐의 재상 진여(陳余)도 오랜 친구이자 새로 상산왕(常山王)에 임명된 장이(張耳)를 공격했다. 그러나 항우는 이런 반역들이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인 줄 모르고 강력한 병력만 있으면 자신의 황당무계한 정책을 관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전영을 공격하여 소멸시킨 다음 서쪽으로 군사를 돌려 진여를 없앨 준비를 했다.

 예상대로 전영은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전사했다. 항우는 병사들을 풀어 약탈과 살상을 마구 저지르게 했다. 백성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모아 무장 저항에 나서는 수 밖에 없었다.

 반란은 항우의 군사적 승리에 비례해서 더욱 확대 되었고, 서초의 군대는 목숨을 걸고 지칠 때까지 싸워야 하는 피곤한 구덩이에 빠졌다.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이 이끄는 새로 결집 된 제국(齊國) 군대가 항우와 쫒고 쫒기는 숨바꼭질 같은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편 멀리 서쪽 산림 속에서 틈을 엿보던 한왕(漢王) 유방은 드디어 기회를 포착하고는 서서히 남정을 출발하여 진령산맥을 넘어 옛날 진왕국의 영토에 항우가 봉한 몇몇 왕들을 일거에 소탕했다. 그런 다음 대군을 몰아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가련한 양치기 왕 미심의 장례를 계기로 모두 함께 나서 군주를 죽인 항우의 죄를 묻고자 전국에 호소했다.

 기원전 205년 4월, 유방은 항우의 수도 팽성(강소성 서주)을 공격하여 함락했다.

 팽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즉각 전횡을 포기하고 몸소 3만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남하하여 반격에 나섰다. 한군은 대패했다. 곡수와 사수 사이에서 빠져 죽은 병사만 10만 명이 넘었다. 유방은 영벽으로 퇴각했다. 항우는 유방을 추격했고, 유방은 또 한 번 대패하여 수수에서 한군 10여만 명이 익사했다. 이 두차례의 전투는 항우의 병력이 얼마나 용맹하고 날랜지 잘 보여주었다. (백양중국사, 백양지음,김영수 옮김, 역사의 아침, 2014, 515~517쪽)

 

2) 중국역사 이야기 발췌

   기원전 205년 정월은, 패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제나라를 쳤다.

  몇 차례의 싸움에서 패전한 제왕 전영은 평원으로 도망쳤다. 전영은 평원의 백성들에게 식량과 마초를 바치라고 강요하면서 조금만 늦게 바쳐도 마구 때렸다. 이에 분개한 평원의 백성들은 일시에 몇 만 명이 단합하여 들고 일어나 전영을 죽여버렸다. 패왕은 다른 사람을 제왕으로 임명했는데 제나라 백성들은 그를 반대했다. 화가 난 항우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앞으로 다시는 자기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게 하려고 제나라의 성곽을 몽땅 허물어버렸다. 이에 실망한 제나라 백성들은 패왕이 제나라를 떠나자 반란을 일으켰다.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은 이 기회를 틈타 제나라 백성들에게 외래인의 침략을 물리치고 자기 고향을 보위하여 일어나라고 호소하였다. 민심을 얻은 전횡은 성양을 점령한 다음 전영의 아들 전광(全廣)을 제왕으로 모시고 자기는 스스로 장군으로 지칭했다. 패왕은 또다시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 군민들이 일심단결하여 성양성을 지키는 바람에 패왕은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이때 한왕이 서쪽으로부터 쳐들어왔다....(중략)...

  항우를 멸망시킨 한고조는 이젠 만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 우울해하면서 술도 통쾌하게 마시지 못했다. 이때 누군가가 한고조에게 물었다. " 폐하께서는 어이하여 술도 마음껏 드시지 않습니까?" "제왕 전횡이 아직도 섬에 숨어 있고, 항우의 대장군 종리매가 암암리에 우리의 사람들을 꼬드기고 있소. 이 두사람이 살아 있으면 항우가 살아 있는 것과 같은데 내가 어찌 시름을 놓고 술을 마시겠소?"

 전횡은 제왕 전영의 동생이다. 전영의 아들 전광이 죽자 전횡이 제왕이 되었다. 한신의 공격을 받아 전멸당하다시피한 전횡은 5백여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동해 바다의 한 섬으로 도망쳤다. 한고조는 사신을 파견하여 전횡에게 알렸다.

 " 그대가 만약 돌아오면 왕이나 제후로 봉해 주고 그러지 않는 날에는 군사를 보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키겠다." 전횡은 할 수 없이 5백여 명의 장사들과 고별하고 두 심복만 데리고 사신을 따라 섬을 떠났다. 낙양에서 30여 리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 전횡은 자기의 두 심복에게 말하였다. " 나는 원래 한왕과 동급이었네. 그런데 지금 그는 천하를 좌지우지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에게 투항하러 가는 신세가 되었으니 창피하기 그지없네. 그가 마음이 내키면 나를 왕이나 제후로 봉해 주겠지만 좀 언짢은 일이 있으면 목을 자를 것이네. 그러니 내가 왜 스스로 남의 올가미에 목을 들이밀겠는가?" 전횡은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사신이 돌아와 이 일을 한고조에게 알렸다. 한고조는 이 소식을 듣고 장탄식을 했다. 그는 그들을 매장해주고 전횡에게 제후왕의 장례식 절차를 밟고 분묘를 세워주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전횡의 묘'(하남성 언사현 서쪽에 있음)이다. 이어 한고조는 또 사신을 파견하여 섬에 남아 있는 전횡의 부하들을 돌아오게 했다.

 5백여 명의 부하들은 모두 호신용 칼만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전횡의 분묘에 제를 지내고 비애에 찬 노래를 부르고는 모두 자결했다. (중국 역사 이야기03, 박덕규, 일송북, 2008, 135~168쪽)

 

3) 사기 권94 전담열전 제24 번역본 (전씨의 후예가 세운 전제(田齊))

  * 전담(田儋)은 적현(狄縣) 사람으로, 옛 제나라 왕족 전씨(田氏)의 후예이다. 전담의 사촌 동생 전영(田榮)과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은 모두 세력가로서 강대한 배경으로 대중들을 휘어 잡았다.

 * 진섭(陳涉)은 처음 군사를 일으켜 초왕(楚王)으로 군림하고, 주불(周巿)을 파견해 위(魏)나라 땅을 침략해 평정한 뒤, 북쪽으로 적현에 당도하게 했다. 그러나 적현의 성은 굳게 방비되어 있었다. 전담은 거짓으로 자기 노복을 결박하고, 청년들을 대동한 뒤에 관아에 당도해 노복을 살해 하겠다는 보고를 하려 했다. 전담은 적현의 현령이 나타나자 그를 때려 죽인 뒤 세력가와 청년들을 소집해 놓고 "제후들이 진(秦)나라에 대항하며 자립하고 있소이다. 제나라는 오래 전에 세워진 나라로서 나는 그 전씨의 후예이니 당연히 왕이 되어야 하오."라고 말하고, 마침내 스스로 제나라의 왕위에 올라 군사를 일으켜 주불을 공격하였다. 주불이 군사를 철수하고 돌아가자, 전담은 군사를 이끌고 동쪽 제나라 땅을 점령했다.

 * 진(秦)나라 장군 장한(章邯)이 임제에서 위나라 왕 구를 포위하였는데 그 형세가 위급했다. 위나라 왕이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제나라 왕 전담은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구원했다. 장한의 군사는 한밤에 몽둥이(주 ; 소리를 죽이기 위해 입에 물었던 작은 막대기)를 입에 물고 습격해 제나라와 위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임제 아래에서 전담을 살해했다. 전담의 사촌 동생 전영이 패잔병을 모아 동쪽 동아(東阿) 땅으로 패주하였다.

 * 제나라 사람들은 왕 전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옛 제나라 왕 전건(田建)의 동생 전가(田假)를 제나라의 왕으로, 전각(田角)을 재상으로, 전간(田間)을 장군으로 옹립해 제후들에게 대항하게 했다.

 * 전영이 동아땅으로 패주하니 장한이 추격해 그를 포위했다. 항량(項梁)은 전영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병사를 끌고 장한의 군사를 동아 땅 아래에서 격파했다. 장안이 서쪽으로 달아나자 항량이 기세를 타고 그를 추격했다.

 한편 전영은 제나라 사람들이 전가를 왕으로 옹립한 것에 화가 나서 곧바로 병사를 끌고 귀국해 제나라 왕 전가를 몰아냈다. 전가는 초(楚)나라로 도망을 갔고, 재상 전각은 조(趙)나라로 도망 갔으며, 전간은 이미 조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갔기 때문에 그곳에 체류하면서 돌아오지 않았다. 전영은 전담의 아들 전불(田巿)을 제나라 왕으로 옹립하고 그를 보좌 했으며, 전횡은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평정했다.

 * 항량이 장한을 추격했지만, 장한의 병력이 더욱 강성해지자, 항량은 사신을 파견해 조나라와 제나라에 알리고, 군대를 출동시켜 장한을 함께 공격하자고 했다. 이에 전영이 "초나라가 전가를 죽이고, 조나라가 전각과 전간을 죽이도록 한다면 기꺼이 출병하겠소."라고 말하니 초회왕이 "전가는 우방국의 왕으로서 궁지에 몰려 우리에게 의지하려 왔는데 그를 죽이는 것은 의롭지 않은 일이오."라고 말했다. 조나라 역시 전간과 전각을 죽이면서까지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제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독사가 손을 물면 손을 자르고, 발을 물면 발을 자르는 법이오. 왜 그러겠소? 몸에 해를 끼치기 때문이오. 지금 전가, 전각, 전간은 초나라와 조나라에게 손과 발의 관계가 되지 않는데 어찌 죽이려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진(秦)나라가 다시 천하의 호응을 얻는다면 반란자의 무덤까지 파헤칠 것입니다."라고 했다.

 초나라와 진나라가 말을 듣지않자 제나라 역시 화가 나서 끝내 출병하려 하지 않았다. 장한은 항량을 죽이고 초나라 병사를 격파했다. 초나라 병사가 동쪽으로 도주하니 장한은 황하를 건너 거록(鉅鹿) 땅에서 조나라를 포위했다. 항우(項羽)가 달려가 조나라를 구원했는데, 항우는 이일로 전영을 원망하게 되었다.

 *항우는 이미 조나라를 구원하고 장한을 굴복시켰으며, 서쪽으로 진군해 함양을 피로 물들이며 진(秦)을 멸망시키고 제후들을 왕으로 책봉했다. 제나라 왕 전불을 파견해 교동왕(膠東王)으로 책봉했고, 즉묵(卽墨) 땅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제나라 장군 전도가 항우를 따라 조나라를 구원하면서 그 길로 함곡관(函谷關)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전도를 제나라 왕으로 옹립하고 임치(臨淄)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옛 제나라 왕 전건의 손자인 전안(田安)은 항우가 막 황하를 건너 조나라를 구원했을 때 제수 북쪽의 몇 개 성을 무찌른 뒤 군사를 거느리고 항우에게 투항을 한 적이 있었다. 항우는 전안을 제북왕(濟北王)으로 세우고 박양(博陽)에 도읍하게 했다. 전영은 항량에게 거역했고, 출병해 초나라와 조나라를 원조하고 진나라를 공격하는 것에 호응하지 않았기에 왕이 되지 못하였다. 조나라 장군 진여(陳餘) 역시 실각해 왕이 되지 못하였다. 두 사람 모두 항왕을 원망했다.

 * 항왕이 귀국하고 제후들은 각자 제후국으로 돌아가자, 전영은 어떤 사람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진여를 도와 조나라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시키고, 자신 역시 군대를 동원해 전도(田都)를 공격하니, 전도가 초나라로 달아났다. 전영이 제나라 왕 전불을 붙잡고 교동 땅으로 가지 못하게 하자, 전불의 신하들이 "항왕은 포악하기 때문에 왕께서는 교동 땅으로 가셔야 하옵니다. 가지 않으면 반드시 위험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니, 전불은 두려워 곧바로 봉지로 도망 가듯이 가버렸다. 전영은 화가나서 제나라 왕 전불을 추격해 즉묵 땅에서 살해했다. 돌아오면서, 제북 왕 전안을 공격해 죽였다. 이리하여 전영은 곧 스스로를 제나라의 왕이라 하고 삼제(三齊) 땅을 병합했다.

 * 항왕이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하고는 곧바로 북쪽으로 제나라를 토벌했다. 제나라 왕 전영의 군사들이 평원(平原)으로 패주하니 평원사람들이 전영을 살해한다. 항왕은 마침내 제나라 성곽을 불 질러 평평하게 만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육했다. 제나라 사람들은 서로 모여 반항을 했다. 전영의 동생 전횡은 흩어졌던 병사를 수습해 수만 명이 되자 성양(城陽) 땅에서 항우에게 반격을 가했다. 한편 한왕(漢王)은 제후들을 이끌고 초나라를 무찌른 뒤 팽성으로 들어갔다. 항우는 이 소식을 듣자 제나라를 포기하고 귀국해서 팽성에서 한나라를 공격했다. 이로 인해 연달아 전쟁을 벌였고, 형양에서 서로 대치했다. 이때문에 전횡은 다시 제나라의 성읍을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되었고,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나라 왕으로 옹립하고 전횡 자신은 그를 보좌하여 국정을 도맏았는데, 크고 작은 궁정일 모두를 재상이 결정했다.

 * 전횡이 제나라를 평정한 지 3년이 흐른 뒤에, 한왕은 역생(酈生)을 전광과 재상 전횡에게 보내 한나라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전횡은 옳다고 여기고 역하 땅에 있던 군대를 해산 시켰다. 한나라 장군 한신(韓信)은 병사를 이끌고 장차 동쪽으로 제나라를 치려했다. 당초에 제나라는 화무상(華毋傷)과 전해(田解)를 시켜 역하 땅에 진지를 치고 한나라와 대치하게 했다. 한나라 사신이 도착하자 수비를 풀고 사병에게 음주를 허락했다.

 제나라는 사신을 파견해 한나라와 화평하려고 했다. 한나라 장군 한신은 이미 조나라와 연나라를 평정하고, 괘통의 계락에 따라 평원 나루를 건너 제나라의 역하군(歷下軍)을 습격하고 그 기세를 몰아 임치로 입성한다. 제나라 왕 전광과 재상 전횡은 화가 나서, 역생이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역생을 삶아 죽였다. 제나라 왕 전광은 동쪽 고밀로 달아나고, 재상 전횡은 박(博)으로 달아났으며, 임시 재상 전광은 성양으로 달아났고, 장군 전기는 교동에 진을 쳤다.

 초나라는 용저(龍且)를 파견해 제나라를 구원하게 하고 제나라 왕과 고밀에서 함께 진을 친다. 한나라 장군 한신과 조삼(曺參)은 용저를 죽이고 제나라 왕 전광을 사로 잡았다. 한나라 장군 관영(灌嬰)은 제나라 임시 재상 전광을 추격해 사로잡고 박 땅으로 진격했다. 전횡은 제나라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제나라 왕위에 올라 반격을 가했다. 관영은 전횡의 군사를 영 땅 아래에서 무찔렀다. 전횡은 양(梁)나라로 패주해 팽월(彭越)에게 귀순했다. 팽월은 당시에 양 땅을 거점으로 중립을 지키면서, 한왕을 위하기도 하고, 초왕을 위하기도 하면서 일을 하려고 했다. 한신은 이미 용저를 죽이고 연달아 조삼에게 진군을 명령해 교동 땅에서 전기를 때려 죽이게 했으며, 관영에게는 제나라 장군 전흡(田吸)을 천승 땅에서 때려 죽이게 했다. 자신이 제나라 임시 왕이 되겠다고 요청했다. 그러자, 한나라에서는 그를 왕으로 옹립했다.

 * 그로부터 일년여 뒤에 한나라는 항적(項籍)을 멸망시키고, 한왕은 황제에 즉위했으며, 팽월을 양나라 왕으로 삼았다. 전횡은 주살 될 것이 두려워 자기의 무리 5백여명과 함께 바다로 들어가 섬에 살았다. 고제(高帝 ; 한고조 유방)가 이 소식을 듣고, 전횡 형제는 제나라를 평정했고, 제나라의 많은 현자들이 그를 따랐으니, 지금 바다 가운데 방치 해두고 거두지 않으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생각해 사신을 보내 전횡의 죄를 사면하고 그를 불러오게 했다.

 전횡은 다음과 같은 사유로 사절했다. "저는 폐하의 사신 역생을 삶아 죽였고, 듣건대 지금 그의 동생 역상이 한나라 장군이 되었고, 그는 어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저는 송구스러워 감히 조서를 받들지 못하겠으며, 청컨대 평민이 되어 해도(海島)를 지키게 해주십시오." 사신이 돌아와 보고를 하자 곧바로 위위(衛尉) 역상에게 " 만약 제나라 왕 전횡이 돌아왔을 때, 그를 수행하는 사람과 말을 괴롭히는 자가 있으면 일족을 멸하는 죄를 내리리라!"는 조서를 내리고, 다시 사신에게 부절(符節)을 들고 역상에게 조서를 내린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게 하면서 "전횡이 오면 크게는 왕으로 작게는 제후로 봉할 것이다. 오지 않으면 장차 군대를 보내 그를 주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횡은 곧 자신의 빈객 두 사람과 함께 역마를 타고 낙양(雒陽)으로 향했다.

 * 낙양에서 30리 떨어진 시향(尸鄕) 역의 마굿간에 도착했을 때, 전횡은 사신에게 완곡하게 "남의 신하가 된 자가 천자를 알현하는 데 마땅히 목욕을 해야지요."라고 말하며 유숙했다. 전횡은 자신의 빈객에게 "처음에 나 전횡과 한왕은 모두 남면(南面)하며 왕이 되어 '고(孤)'라고 자칭했지만, 지금 한왕은 천자가 되고, 나는 망명을 다니는 포로가 되어 북면하면서 그를 섬겨야 하니, 이 치욕은 정말로 참기가 어렵소. 나는 장차 남의 형을 삶아 죽이고도 그 동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그 군주를 섬겨야 하오. 비록 그가 천자의 조서가 두려워 감히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고 하지만 내 어찌 마음 속에 부끄럼이 없겠소? 또한 폐하께서 낙양에 계시니 지금 내목을 잘라 30리를 말로 달린다면 모습이 변질되지 않을 것이며 그런대로 볼 만할 것이오."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자기의 목을 자르려고 하면서, 빈객에게 자신의 목을 받들고 사신을 따라 말을 달려 고제에게 아뢰도록 했다.

 고제는 "아, 이유가 있었구나! 평민에서 시작해 삼형제가 번갈아 왕이 되었으니, 어찌 어질지 아니한가?"라고 말하며,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는 그의 두 빈객들을 도위(都尉)로 임명하고 군졸 이천명을 선발해 왕의 예를 갖추어 전횡의 장례를 거행하게 했다.

 * 장례가 끝나자 두 빈객들은 무덤 옆에 구덩이를 파고 모두 스스로 목을 베고 거꾸로 처박혀 전횡을 따라 죽었다. 고제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전횡의 빈객들이 모두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 나머지 5백명은 여전히 바다 가운데 있다가 사신을 시켜 불러오게 했는데, 그들은 도착해 전횡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자살 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전횡 형제가 선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 태사공(사마천)은 말한다.

  "심하도다. 괴통(蒯通)의 계략이여! 제나라의 전횡을 현혹 시키고 회음후(淮陰候)를 교만하게 만들어 마침내 저 두 사람을 망쳤구나! 괴통은 언변술에 능통해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권모와 임기응변을 논한 81편의 글을 지었다.

 괴통은 제나라 사람 안기생(安期生)과 친했으며, 안기생은 일찍이 항우(項羽)에게 벼슬자리를 얻기 바랐지만, 항우가 그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았다. 얼마 있다가 항우가 이 두 사람을 책봉하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끝내 받으려 하질 않고 도망갔다. 전횡의 고상한 절개와 그의 빈객들이 그의 의리를 흠모해 따라 죽은 것은 어찌 더할 수 없는 현명함이 아니리오! 나는 이런 이유로 그를 열전(列傳) 속에 넣었다. 천하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없지 않았을텐데 끝내 그 절개를 그리지 못했으니 어찌 된 일이가?" (보령문화원 목요강좌 인쇄물 참조, 강사 ; 김영수)

 

 4) 태공망(太公望)의 강제(姜齊)

   * 주나라 사람들 중에 우리와 친근한 사람이 있다면 단연 강상, 곧 강태공(姜太公)일 것이다. 태공이란 이름은 이미 낚시꾼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의 지위에 올라 있으며, 낚시꾼의 미덕인 기다림과 인내를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의 대표자로 꼽힌다. 본디 주나라 사람도 아닌 강족(羌族)으로, 환갑이 넘은 나이에 강가에서 미끼도 없는 낚싯대로 낚시질을 하다가 문왕에게 발탁되어 은나라(원래 나라이름은 商이며, 도읍의 이름이 殷이다.)를 정벌하는 장수가 되고, 큰 공을 세워 제(齊)나라의 제후가 된 일은 성공 신화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가 3천년이란 세월을 넘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으리라. 사실 강족은 서주의 '희(姬)'씨 성을 가진 부족과 대대로 절친한 사이였다. 주나라 사람들은 유목과 농사 사이를 오락가락했지만, 강족은 주나라 사람보다 서쪽에 살면서 유목민으로 생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성씨가 '강(姜)'이다. 이들은 누대에 걸쳐 주나라 사람들과 혼인관계에 있었고, 아마 문왕의 18명이 넘는다고 알려진 많은 아들을 낳아준 것도 대부분 이 강족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태공은 무왕의 숙부뻘이었을지도 모르며, 말을 타고 이동에 강한 유목민이었기에 농경민족이었던 주나라 사람들보다 전쟁에 능했을 수도 있다.(주나라와 조선, 장인용, 창해, 2016, 19~20쪽)

  * 강태공은 은나라를 점령하고 얼마 있다가 자신의 봉읍지인 제나라로 떠났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제는 중원의 변방이자 동이족의 세상이었다. 주왕이 이를 평정하였다고는 하지만, 다시 세상이 바뀐 때이니 배후의 안정이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고, 강상이 군사적으로 가장 실력자였던 터라 이를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그는 산동반도에 가서 제나라를 세우고, 다시 주공과 협력하여 '삼감의 난'에서 비롯된 위기를 넘기는데 일조하게 된다.(상기 책, 92~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