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미산면 도흥리는초입새인 봉성리 삼거리로부터 아미산 골짜기인 백제골을 비롯해 도흥천을 따라 월명산과 천덕산으로 둘려처진 10여 리 길의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어 있다. 아마도 70년대 전 만해도 빈농을 벗어날 수 없었던 산촌이었을 것 같다. 우연히 천덕산 가교비를 답사하면서 '도흥리에 있던 한 사찰의 스님이 이 길을 개척하고 이곳에 돌다리를 놓은 뒤 비문을 새겨 두었다'라는 안내판의 글을 보고 지도를 놓고 한참이나 생각해 보았다.
불가에서 덕을 쌓는 일 중 가장 큰 것이 길을 내거나 냇가에 징검다리를 놓는 일을 큰 보시로 생각하였다.
큰돌을 옮겨 징검다리를 놓거나, 통나무를 엮어서 나무다리를 설치하는 일은 개울을 건너던 동네사람들이 모여 두레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화강암으로 교각을 설치하고 판석을 깔아 우마차라도 다닐 수 있는 돌다리는 감영의 현감과 향토지주들의 도움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령시내를 관통하는 한내천에 돌다리를 설치한 것도 그런 관청에 의한 대역사였으며, 홍산의 만덕교 또한 관청에 의해 설치된 것으로 홍산관아의 비석군에 있는 만덕교비라는 공덕비에 의해 알 수 있다.
이처럼 교비(橋碑)는 대체적으로 그것을 건립한 현감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 대부분인데, 이처럼 개인이 설치한 교비를 기리기 위해 산 중턱의 마당바위 위에 자연석으로 잘 다듬지 않은 자연석에 내용을 석각한 교비는 흔치 않은 일이라 생각이 든다.
깊은 산중에 다리를 놓을 정도의 냇물이 흐르는 곳도 아닌데 왜 이곳에 교비를 세우게 되었을까?
천덕산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이라면 잔교(棧橋)를 설치하느라 그렇다고 하겠지만, 지도를 펼쳐 놓고 등고선으로 확인해 보았지만 잔교를 설치할 깊은 계곡도 없고, 통나무 다리를 설치할 냇가도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면, 도흥리를 흘러내리는 도흥천의 상류 비득재를 올라가는 진입 지점에 어떤 형태로든 다리를 축조하여 홍산시장을 넘나드는 주민들의 편의를 주었기에, 마을 사람들이 아홉싸리 고갯를 넘나들며 쉴 수 있는 마당바위에 공덕비를 세워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도흥리 사람들은 왜 아홉싸리 고갯길을 개척하여 홍산을 생활 권역권으로 하였을까?
현재의 교통로에 의해서 주된 시장까지의 거리를 측정 해보니 봉성 삼거리에서 웅천역까지는 23km, 구대천역까지는 24km인데 비해 홍산면 소재지까지는 불과 10km이다. 조선시대에 남포나 보령에 감영이 있었듯이 홍산에도 현감이 다스리던 감영이 있는 읍성으로 도흥리 사람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홍산시장을 근세까지도 활용 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더군다나 도흥리 사람들은 천덕산과 병목산 사이의 비득재를 오른 후에 천덕산의 허리를 끼고 아홉싸리 고갯길로 경유한다면, 상기리 마을을 거치지 않음으로써 더욱 길이 짧아져서 홍산으로 걸어가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기에 일일 생활권에 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당바위는 홍산과 도흥리의 중간지점으로 지게짐과 개나리봇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휴계소 역활을 하였다고 본다.
직육면체의 가교비는 오랜세월 풍우에 심한 균열이 있으며, 바위에 발생하는 이끼가 덮여 있고, 석각 된 글자는 알아보기 쉽지 않다. 시주승의 이름을 어렵풋 읽을 수 있고, 몇 글자는 맨눈으로도 추측할 수 있겠다. 도지정 문화재자료로 지정이 되었다면 탁본을 뜬 기록이 있을 것이고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 놓은 자료도 있을텐데 찾기가 어렵다.
이 가교비가 부여군에 위치하고 있지만, 보령의 도흥리 사람들의 생활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자료인 만큼, 보령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해 보아야 할 자료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2. 가교비
* 위치 ; 부여군 옥산면 상기리 산 19번지
* 지정 :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18호(1984.5.17)
0. 가교비(架橋碑)
가교비는 다리를 놓은 후 그 과정을 기록해 놓은 비석이다.
이곳은 부여의 옥산면과 보령의 미산면이 맞닿아 있는 천덕산 아홉싸리 고갯길의 마당바위라 불리는 곳이다.
예전에 이곳은 고갯길을 넘는 사람들의 쉼터 역활을 하였을 것이나 지금은 교통이 발달하여 거의 잊혀진 길이다.
비는 방처럼 넓게 깔린 바위 윗면에 비문을 새겨놓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비문이 많이 닳아 있어 확실히 판독하기 어렵지만 원래는 30자 가량의 글씨를 4줄로 새겨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령 미산의 도흥리에 있던 한 사찰의 스님이 이 길을 개척하고 이곳에 돌다리를 놓은 뒤 비문을 새겨 두었다고 전한다.(현장 안내판 참조)
@ 가교비가 위치한 천덕산 중턱 너럭 바위(마당 바위)
@ 가교비와 문화재자료 제118호 안내판과 유적비
@ 들머리쪽에서 바라본 가교비
@ 가교비 원형의 모습
@ 가교비 상단부분 촬영
@ 가교비 하단 부분 촬영
@ 날머리쪽에서 바라본 전경
@ 가교비 전경
@ 가교비 안내판
'보령의 흔적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38편 ; 외연도 수호신 전횡(田橫) 장군 (0) | 2022.03.17 |
---|---|
제137편 ; 토정선생의 자식들 (0) | 2022.03.08 |
제135편; 다산의 성호 이익 추모 학술대회 흔적 (0) | 2022.02.22 |
제134편 ; 오천 선림사 불상 (0) | 2022.01.27 |
제133편 ; 보령 학성리 공룡발자국 화석 (0) | 2022.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