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37편 ; 토정선생의 자식들

푸른나귀 2022. 3. 8. 19:48

1. 들어가며

 

  '조선의 수퍼스타 토정 이지함'의 저자는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보령시 천북 출생의 이태복이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서고에 꽂혀있는 이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문구의 '토정 이지함'을 읽어본 것이 오래전의 일인데 저자 역시 이문구의 책을 여러 도서 중에 자료로 이용하여 이 책을 발간한 것이다.

 토정선생이 보령의 인물임을 익히 알고 있지만, 고만에 웃대의 묘를 쓰면서 자신에게는 운이 닿지 않음을 알면서도 후대 집안의 번영을 위해 자기 희생을 치루었다.

 형들의 집안에서는 산해와 산보가 조정으로 나가 이름을 떨치었으나, 자신에게는 안타까움만 후세에 전해진다. 이 책에서 토정선생 직손들의 불운했던 인생 이야기가 펼쳐저 선생이 살아가던 시대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보령의 안물 중에 이산겸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2. 토정선생의 불운한 자식들

 

   토정 이지함의 아버지 이치(李穉)는 광성부원군 김극성의 누이와 결혼을 하여 처가인 광산김씨의 세거지인 보령땅에 그 시절의 관습대로 처가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이치는 4남을 두었으니 첫째 지영은 일찍 죽는 바람에 둘째인 지번이 장남이 되었으며 산해와 산광을 낳는다. 셋째 지무는 산보를 낳았으며, 넷째인 지함은 태종 이방원에게 임금의 자리를 내주었던 정종의 증손인 이정랑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들인다. 지함은 여기서 산두, 산휘, 산룡을 얻고 후인에게서 산겸을 얻게된다.

 

 선생이 한산에 있는 웃대의 선영을 찾을려면 길이 멀었기에 보령땅에 선산을 잡고자 성주산과 오서산 줄기를 헤매다가 고만산 아래 명당자리를 찾아내어 형인 지번과 함께 산세와 혈을 자세히 답사 하였다.

 부모님을 모시기에는 더할나위 없었으나, 삼형제가 볼 자식들의 운이 형들의 자식은 관직을 탈 운이었으나, 막내인 선생에게는 자식운이 불길한 형세였다. 선생은 형님들의 운이 좋다면 자신에게도 좋은일이라면서 뒤에는 뛰어난 인물이 나올 자리일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부모의 묘소를 그곳에 쓰게 되었다.

 

 그 다음 해인 1539년 지번은 산해를, 지무는 산보를, 선생은 산두를 얻게 되었다. 큰형과 작은형의 아들들은 비범하고 정직한 재목으로서 나라의 중책을 맡았을 뿐 아니라 문장과 인격에서도 대인군자로 이름을 날렸다.

 선생의 첫 아들인 산두는 자질면에서 산해보다 뛰어나고, 됨됨이는 산보보다 훌륭했으나 일찍 요절을 하게된다.

 둘째인 산휘는 선생이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알아들을 정도로 총명했으나, 고만산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아버지의 시묘살이 하던중에 오서산에서 내려온 호랑이에게 물려 안타깝게 일찍 죽게된다.

 장인의 역모 사건으로 바닷가에 은거하다 낳은 셋째 산룡은 열 두살 때 역질로 숨을 거두게 된다.

 넷째인 산겸은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목숨을 걸고 의병을 이끌며 싸웠으나, 선조와 유성룡의 경계로 역모 혐의를 받고 감옥에서 죽으니 선생이 예견했던 대로 자식들은 제 운명을 개척하지 못하였다.

 

 모산 수(守) 이정랑의 딸 전주이씨와 결혼하여 얻은 아들 셋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오직 후취 소생인 산겸만이 살아남아 임진왜란을 겪게 된다. 산겸은 임진왜란 초기에 의병장이자 선생의 제자였던 조헌의 부대에 들어가 보령 서천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그리고 금산 전투에 참가하여 조헌 등은 전사하였으나 자신은 살아남아 1594년 까지 의병활동을 계속했다. ≪조선왕조실록≫ 1592년 11월 1일자에 '한산 사람 이산겸이 조헌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 적을 토벌하고 있다. 이산겸은 지함의 첩의 아들이다. 이지함의 고향이라서 따르는 자가 많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장수 왕필적이 "이산겸이 어떻게 이처럼 간담이 충성스럽고 의리 있는 사람을 배양 했는가?"라고 류성룡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류성룡 또한 '산겸은 좋은 사람'이라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11월 16일에 사간원에서 다른 의병장들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이산겸에게는 임명장을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며, 임명장을 주어 전장에 나가게 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게된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천안과 직산 지역을 거점으로 송유진이란 자가 세력을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자칭한 사건이 일어났다. 송유진은 한양의 서얼 출신으로 군역을 피해 도망친 백성들과 불만이 팽배해진 서얼들, 병사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도모했다. 천안과 공주 사이의 광덕산, 지리산, 속리산, 청계산 등에 부하를 배치하여 1594년 1월 10일 도성을 치기로 하였는데, 충청도 어사 강첨이 이 같은 움직임을 조정에 보고했다. 송유진의 일당이었던 홍음개, 홍우, 홍근, 신계축 등이 배반하여 송유진,유춘복, 김천수, 심희수, 오원종 등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에 선조는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여 모반의 괴수를 잡고자 심문을 하게 되는데, 송유진이 수괴는 자신이 아니라 이산겸이라고 충청병사 변양준에게 고변을 해 이산겸이 즉시 체포되어 도성으로 압송된다.

 이산겸이 체포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이산겸이 의병장으로 있어서 크게 환란이 일어날 것을 걱정했는데, 그가 잡혔으니 근심을 덜었다'라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러나 국문을 통해 송유진이 수괴이고, 서얼출신으로 이름을 날린 의병장이었던 이산겸을 전혀 알지 못하였지만 끌어댔다는 것이다. 선조는 이산겸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을 하였으나 의정부 대신들과 이산겸의 처리문제를 직접 신문하기로 한다.

 1594년 2월 27일 의정부 대신들이 이산겸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한 사람들을 전부 체포하여 일이 확대된 점을 걱정하자 선조는 주변 사람들을 조사하고 나서 정범을 조사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이산겸은 분명 범람한 사람이고 무릇 범람하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을 한다며 친국을 지시한다. 이때 영의정이자 도제찰사는 류성룡, 충청감사는 윤승훈이었고 좌의정은 윤근수였다. 

 선조는 직접 심문을 하면서 압사(壓沙; 무릎사이에 막대기를 끼워 고문하는 것)와 낙형(烙刑; 인두를 불에 달궈 몸을 지지는 고문)을 시행하면서 모반의 수괴임을 증명하려 고문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지함의 마지막 남은 혈육 이산겸은 명나라 장수가 높이 평가한 대로 출중한 지휘 능력과 지역적 기반을 염려한 선조에 의해 아무 죄 없이 고문 끝에 죽고야 만다.

 

 저자는 선조실록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있다.

 첫째로는 선조와 유성룡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송유진 반란 사건의 수괴는 이산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고 보았다.

 둘째, 이산겸은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뒤늦게 알고 사촌형 이산보를 찾아가 상의했는데, 산보가 자진출두를 권하여 이에 따랐다. 산보가 죄의정 윤근수 등에게 서신 등을 통해 이산겸을 만나게 주선했으나 조정 대신들은 적극적 역활을 하지 않았다.

 셋째, 이산겸의 장인 신곡과 처남 신기일 등 이산겸의 의병부대원들도 보령과 한성의 감옥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넷째, 이들에게서 역모 혐의를 찾지 못하자 선조와 유성룡은 성격이 범람하므로 믿을 수 없으니 무릎을 찍어 누르는 압사와 인두로 지지는 낙형을 가하여 죽인다.

 

 당시 군사와 행정 등 모든 실권을 쥐고 있던 류성룡이 선조의 의중에 부화하여 죄 없는 의병장을 죽음으로 방치하고, 이덕형은 산겸의 아버지 지함이 이산해의 딸과 혼인하도록 중매까지 한 각별한 인연이 있음에도 이산겸의 죽음을 외면하였다. 사촌 형 산보가 충청도 검찰사로 근무하면서 사촌동생의 구명을 위해 발 벗고 뛰었지만, 사촌 이산해의 사위였던 이덕형은 적극적인 변론을 하지 않았다.

 이로써 토정 이지함의 자식으로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백성사랑을 전란 중에 이어갔던 산겸마저 안타까운 운명을 맞게 되었다.(조선의 수퍼스타 토정 이지함, 이태복, 동녘, 2011, 290~300쪽 발췌)

 

 

  @ 조선의 슈퍼스타 토정 이지함(이태복, 동녘,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