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다산 정약용은 1795년 7월 금정도 중심역의 수장인 금정찰방으로 좌천 부임해 용곡역에서 1795년 12월까지 약 5개월 간 근무를 하면서 기호지방 천주교계의 중심인물인 예산 출신 이존창(李存昌)을 검거하는 데 공헌을 하게 된다.
노론세력에 의한 남인세력의 견제 방법으로 천주교는 아주 적절한 구실이 되어 족쇄역활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벗어나는데에 이존창의 검거는 정약용의 족쇄를 어느정도 벗어나게 해주는 역활을 하게된 것이다.
정약용이 실현한 사상적 사고는 성호 이익선생의 실학사상에 의해 구축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다산이 직접 성호선생에게 사서를 받은적은 없으나, 그 당시 실각 되었던 기호,호서, 영남지역의 남인들은 지연,혈연관계로 노론과의 대립에서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익선생의 추모 학술대회가 열렸던 봉곡사는 아산시 송학면 유곡리 595번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차후 방문하기로 하고, 다산 정약용이 용곡에 머물면서 스승으로 여기던 성호 이익선생의 추모학술대회를 열었던 내용을 책에서 읽고 참고하고자 아래와 같이 발췌하였다.
2. 참고 자료
금정은 충청도 홍주(洪州)에 소속된 역원(驛院)인데, 천주교가 성행하는 내포(內浦)에 속한 지역답게 역속(驛屬) 대부분이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또한 기호 남인들도 적지 않게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정약용은 신종수(申宗洙, 청라), 채홍규(蔡弘逵,홍주), 윤취협(尹就協) 같은 선비를 만나고, 방산(方山) 마을에 숨어 사는 이도명(李道溟)이라는 노인을 찾기도 했다.
정약용은 또한 부여현감 한원례(韓元禮)의 초청으로 부여를 방문했다. 조룡대(釣龍臺)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부여 조룡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서울에서 화가 최북(崔北)의 그림 「조룡대」를 보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무슨 그림이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옛날 소정방이 백제를 칠 때 백마강에 이르니 신령스러운 용이 나타나 안개와 바람을 일으키므로 군사가 건널 수 없었다. 이에 소정방은 크게 노하여 백마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아 죽이니 안개가 걷히고 바람이 멎었는데 이것이 그것을 그린 그림이다. 「조룡대기(釣龍臺記」
부여에 도착해 고란사 밑에서 배를 타고 조룡대에 오른 정약용은 크게 실망한다.
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찌 이리 황당함을 좋아하는가! 조룡대는 백마강의 남쪽에 있는데, 소정방이 여기에 올랐다면 이미 군사들이 강을 건넌 후였을 것이니 어찌 눈을 부릅뜨고 용을 낚아 죽였겠는가? 또 조룡대는 백제성(사비성) 북쪽에 있으니 소정방이 이 대에 올랐다면 성은 이미 함락된 후였을 것이다. 당나라 군선이 바다로 와서 백제성 남쪽에 상륙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강을 수십리나 거슬러 올라가 이 조룡대 남쪽에 이르렀겠는가? 「조룡대기(釣龍臺記」
조룡대를 보고 실망한 정약용은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를 지어 계백장군을 노래했다.
강안을 가로막은 철옹성만 보았기에 惟看鐵甕橫江岸
구름 같은 배들 바다 건널 것 안 믿었네 不信雲帆渡海波
술잔 잡아 계백장군에게 제사 올리려네 欲把殘杯酌階伯
안개에 가린 황폐한 사당 등나무만 얽혀 있네 荒祠煙雨暗藤蘿
부여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금정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정약용은 오랜만에 얻은 이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기회를 찾았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성호 이익의 문집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마침 부근 예산의 감사(坎舍)에 이익의 종손자 목재 이삼환(木齋 李森煥)이 살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시는 성호 선생님(郁郁星湖子)'이라고 성호의 호에다 '자(子)'를 붙일 정도로 사숙했던 정약용은 이삼환에게 편지를 보냈다.
연전에 선생님이 서울에 오셨을 때 너무 바빠서 가슴 속에 쌓여있는 의심을 토로해 대군자(大君子)의 넓고 깊은 지식을 이끌어 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부임하여 머무른 곳이 마침 이곳이어서 선생님이 계신 곳과 거리가 몇 십 리에 지나지 않아서 댁에 찾아가서 부지런히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평소에 품었던 아름다운 회포를 풀 수 있을지 위로됩니다. (목재 이삼환 선생님께 올립니다「上木齊書」)
정약용은 자신과 이가환이 받은 공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근래에 제게 일어났던 일은 이미 대강 그 줄거리를 들으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창들이 모두 소릉(少陵) 이가환에게 집중되어 세태의 변천을 바로잡고 나쁜 유행을 막을 수 있는 분을 끝내 저와 같이 거꾸러뜨렸으니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를 길게 한탄하기보다는 성호를 기리는 강학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 아아. 우리 성호선생님(星湖夫子)은 하늘이 내신 영걸스러운 인재로서 도가 망하고 교화가 해이해진 뒤에 나셔서 회재(晦齋,이언적)와 퇴계(退溪,이황)를 사숙하여 삼성의 학문과 경제의 사업을 경위로 삼아 수백여 편의 저서를 써서 후학들에게 아름다운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성호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에 대해 더러 이가환 형과 상의는 하시는지요?" 정약용의 편지는 '가까운 절간에서 회합해' 성호의 사상과 문집을 정리하는 강학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정서하기 위한 종이를 비롯한 모든 경비 또한 자신이 대겠다는 것이었다. 종조부의 문집을 정리하자는데 이삼환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정해진 '가까운 절간'이 온양의 석암사(石岩寺)였다. 석암산에 있어서 석암사라고 부르지만 원래 봉곡사(鳳谷寺)였다. 정약용은 「서암강학기(西庵講學記)」에서 "봉곡사는 온양의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광덕산이요, 서쪽은 천방산이다. 산이 높은 데다 첩첩이 쌓인 봉우리에 우거진 숲, 깊은 골짜기가 그윽하고 오묘해서 구경할 만했다."고 적고 있는데, 정약용이 눈 덮인 봉곡사에 도착한 것은 1795년(정조19년) 음력 10월 26일이었다.
이튿날 예순살에 접어든 이삼환이 도착하고 내포지역의 남인 학자들이 차례차례 모여들었다. 이명환(李鳴煥; 이삼환의 아우), 이재위(李載威; 이삼환의 조카), 이광교(李廣敎), 권기(權夔), 강이오(姜履五), 강이인(姜履寅), 강이중(姜履中;강이인의 재종동생),이유석, 심로, 오국진(吳國鎭) 등으로서 모두 열세 명이었다.
강학회는 11월 5일까지 열흘동안 계속되었는데, 참석자들은 새벽마다 개울물로 나가서 얼음물로 얼굴을 씻고 양치질을 했다. 저녁때에는 산등성이를 산보하면서 주변 경치를 감상했다. 정약용은 윤진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때마침 첫눈이 내려 서남쪽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빼어나게 높고 엄숙해 석양을 우러러 바라보니 마음이 황홀해서 북계(北溪)를 달려 올라갔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낮에는 성호의 유고를 정리하고 밤에는 학문에 대해 강론했는데, 이삼환이 좌장으로서 질문을 하면 다른 선비들이 답을 하고, 다른 선비가 모르는 것을 물으면 이삼환이 설명하는 형식이었다. 성호의 많은 저서 중 「가례질서(家禮疾書)」를 표준으로 삼아 이삼환이 교정을 보고 다른 선비들이 이를 베꼈다. 정약용은 이때의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날 여기에 모였던 선생의 문하가 이 절문을 나가 한번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막연히 서로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고... 혹은 선가나 도가의 교리를 가지고 참된 길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여기 동요되어 스스로 게을러지거나 현혹되어 성호의 학문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식견과 취향이 거칠어질 뿐만 아니라 도리어 진취에 방해가 될 것이다. 마침내는 본원(本源)이 혼탁하여 점차 밝음을 잃고 끝내는 유용한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요순의 경지에 들어가기 어렵게 될 것이니 어찌 주자의 무리가 될 수있겠으며, 또한 성호의 후학이 될 수 있겠는가. 책을 베끼는 여가에 이와 같이 서로 경계하고, 마침내 그 뜻을 말하고 그 일을 읊어서 각기 아래와 같이 시를 짓는다. 「봉곡사시 서문(鳳谷寺述志詩序)
정약용이 굳이 주자를 강조한 것은 천주교 신자라는 혐의로 사실상 유배온 데 대한 자기 방어였다. 이때 모인 선비들은 시를 지었다.
비 내리는 옛 절에 밤은 깊은데
산 구름 첩첩하고 땅 또한 궁벽하네
술잔 기울이며 열흘 동안 모여서
기름 부어가며 새벽까지 불 밣혔네 - 이삼환
선비들이 절에 모여서
성호의 남긴 글을 교정하였네
천질은 사람마다 있는 것
밤마다 지새워 유학을 담론했네
좋은 인연으로 금정에 와서
좋은 가르침 목재(이삼환)께 들었네
절의 부처는 풍경소리 남겨 주고
산신은 흰구름 남겨 왔네 - 이광교
도의 타락하니 세월의 흉흉함을 한탄하다가
저녁나절 벗을 맞아 노경에 기뻐하네
교서하는 보람은 벗과 잠 못 자는 일이나
책괘를 지고 이 고생 달게 여기네
아직도 명적(冥謫)을 편안히 여겨
헛되이 몸 단장 하려 드네
힘썼음이여! 여러 친구들
교정으로 조석을 보냈네 -정약용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1779) 이래 16년 만의 성대한 강학회였다. 마지막으로 이삼환이 강학회의 의의를 정리했다.
성호가 80년 동안 도학을 강론하신 저서가 집에 가득하다.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분변과 정도(正道)를 붙들고 사교(邪敎)를 물리친 말씀과 극기복례하여 인을 행하는 가르침은 땅을 지고 바다를 담은 경지였다. 또 육경과 사서 등의 서적에 모두 질서(疾書)를 저술해서 고금의 성현들이 음미한 말씀과 신오한 뜻을 다시 찬란하게 밝혀 털끝만큼도 유감이 없게 했으니 더할 수 없이 위대하다.
그러나 그 편질이 너무 많아 아직 탈고를 못했는데 그 당시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분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고, 후학들은 학문이 얕아서 끝내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나의 친구 다산이 마침 은대(銀臺 ;승정원의 별칭)로부터 금정의 역승(驛丞) 직임을 맡아 개연히 이 서적의 수정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
이 모임은 금정에 있었던 다산의 발상으로 이루어졌고, 봉곡사로 모이게 된 것도 다산의 뜻이었다. 유교집회가 불교 사원에서 이루어진 것도 다산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봉곡사교서기(鳳谷寺校書記)
@ 참고 자료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편(이덕일, 김영사,2010.9, 226~234쪽)
'보령의 흔적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37편 ; 토정선생의 자식들 (0) | 2022.03.08 |
---|---|
제136편 ; 천덕산 가교비 (0) | 2022.02.27 |
제134편 ; 오천 선림사 불상 (0) | 2022.01.27 |
제133편 ; 보령 학성리 공룡발자국 화석 (0) | 2022.01.27 |
제132편 ; 백제부흥운동의 흔적기행(4) (0) | 2022.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