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흥미를 갖고 옛사람들의 흔적을 쫒다보면 수 많은 가설들을 만나게 된다.
현재라는 시각에서 옛 사람들의 흔적을 6하 원칙에 따른 정확성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함이 따르기에 정통사학과 민족사학이 대립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저 흥미를 갖고 흔적을 찾아보는 일반인에게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럴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긍정적인 인식을 수용하게 된다.
꼭 사실이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들여다 보면 흥미를 잃게 되기에 상상의 나래를 펼 수가 없을 것이다.
백제부흥운동을 잠시나마 들여다보니 천오백 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적은 세월이 아니며, 그 시대를 살아 온 백성들의 생각들을 읽어낸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라 생각이 든다.
책으로 읽어보는 역사는 사람에 따라 시기나 위치의 비정이 서로 다르게 주장을 하며 자기가 옳다는 판단을 하지만, 모두가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라는 수용의 자세에서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임존성과 주류성, 백강구와 백촌강, 백제의 22담로(淡路), 흑치상지의 고향(가야산 밑 혹은 중국 광서성)...
언젠가는 밝혀지겠지만 각자의 주장을 존중해 주는 것도 진실을 밝혀내는 학문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강한 주장은 도리어 왜곡으로 흐를 수 있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2. 참고자료
의자왕 20년(서기 660년) 6월에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 13만 명이 덕물도(다물도, 덕적도)에 와 있고, 김유신이 5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로 처들어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동안 신라를 치고자 자주 군사를 일으켰던 의자왕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란한 국정으로 다급해 하면서 계백에게 오천병사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방어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본기에 의하면 7월9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계백의 백제군을 물리치고, 7월12일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에워싸게 된다. 불과 개전 3일만에 사비성은 포위되고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웅진성으로 달아났으나, 7월19일 의자왕은 당나라에 항복을 하게 된다. 8월 2일에 사비성 안에서 나당 전승잔치가 벌어지고, 9월 3일에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와 대신 그리고 장수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데리고 갔다.
백제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가 있었는데, 당은 이 땅을 다섯 도독부로 나누고, 도독, 자사, 현령을 두고 다스리려고 했다. 당은 백제를 당에 편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무왕의 조카 복신이 군사를 일으키고 중 도침과 함께 주류성에 웅거하여 왜나라에 머물고 있던 왕자 부여 풍을 맞아 왕으로 모시려하자 서북부의 여러 성이 호응을 하게 된다.
이에 복신은 이들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있는 당군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당으로 소정방이 주력군과 함께 돌아간 뒤 사비성은 당 장수 유인괘가 지키고 있었다. 9월5일 백제에서 왜군의 지원을 요청하니 661년 9월 왕자 풍과 함께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복신과 합류하여 풍은 주류성에서 백제 임금의 계를 잇는다.
군사전략을 가지고 복신과 풍왕과의 갈등은 불편한 관계로 쌓여 갔는데 실권과 위세를 업은 복신이 내린 성의 이동 작전이 빗나감으로 풍은 복신을 잡아 묶은 뒤 신하의 동의를 얻어 처형을 한다.
백제왕이 신하장수 복신을 베어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신라군이 8월 13일 주유성을 공격한다. 이러자 풍은 장수들에게 왜나라 구원군 일만 명이 바다를 건너오고 있으니 힘내서 싸워달라 하고 구원군과 어울리려 백촌강 쪽으로 떠난다.
당 수군 170척은 백촌강에 진을 치고 있다가 27일에 도착한 왜수군을 처부수었다. 28일에는 왜나라 장수들과 백제왕은 적진으로 돌진 하였으나 좌우에서 협공하는 당군에게 2만 5천명에 이르는 왜수군이 몰살하게 된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백제왕 풍은 몇몇 사람들과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부여 충 등도 무리를 거느리고 당군에게 항복을 하였다고 「일본서기」는 적고 있다.
그 뒤에 주류성은 무너지고 홀로 남은 것은 지수진이 지키는 임존성 뿐이었다. 이 임존성을 무너트린 장수는 흑치상지라는 백제 장수인데 그는 이제껏 부흥군에 앞장서서 나당 연합군에 맞서 싸워온 인물이다. 그는 누구인가?
70여 년 전 중국 낙양에서 발굴된 그의 묘지에 따르면, 그는 증조할아버지 대에 중국 흑치나라에 백제가 보낸 다무로 확고 집안의 후손이었다. 대대로 달솔이라는 벼슬을 지낸 백제 왕족이며, 원래 성씨가 부여였으나 흑치나라를 다스리면서 흑치라는 성씨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 강남에 있던 백제 다무로에서 달려온 것이다.
바람과 같이 나타난 이 장수 밑에 도망갔던 백제 군사들이 모여들어 열흘만에 3만 명아나 모였다고 한다. 사비성 함락 후에 일어난 일이다. 소정방은 군사를 보내 이들을 쳤으나 크게 진다. 이 당군을 물리친 흑치 장수가 이끄는 부흥군은 여러 백제성을 되차지했고 그 기세가 당당하여 소정방의 당군도 손을 못 썼다고 한다.
흑치상지는 별부장 사타 상여와 함께 험준한 요지에서 부흥전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당으로 끌려갔던 태자 융을 백제도독으로 내세우는 당군에게 포섭되어 무슨 이유에선지 변절하게 된다. 복신을 따르던 흑치상지였기에 복신이 참사되자 부흥군을 떠났다고도 한다.
주류성이 당에게 함락된 뒤, 흑치는 사타상여와 함께 지수진이 지키던 임존성을 빼앗는데 성공한다. 이로써 백제 부흥군은 백제패망 3년 만에 완전히 꺾기게 된다. 그 뒤 흑치는 백제를 다스리던 도독부 안에서 요직을 거쳐 당나라에 가서는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나중에는 모함으로 비운에 간다.
그러나 그가 다스리던 흑치나라였던 고장은 그 일부가 현재 중국 광서성 장족 자치구 내에 있는 '백제허'라는 고을에 남아 있고, 대백제의 후손임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고 한다. (백제와 다무로였던 왜나라들, 김영덕, 글로벌콘텐츠, 2013, 228~235쪽 발췌)
@ 백제와 다무로였던 왜나라들 (김영덕, 글로벌콘텐츠,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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