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어린시절 내가 살던 고향의 냇가에도 작은 바위가 있었다.
온종일 동무들과 미역을 감으면서도 그 바위에 암각된 글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한 갑자 지난 근래에서야 200여 년 전에 새겨진 금석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제31편 ; 도화동 문(桃花洞 門), 2019.4.6 참조)
보령땅에는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유적으로 성주산 성주사지에 세워진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남포방조제부근 보리암 유적지가 있다.(제18편 ; 육지로 변한 보리섬(최치원선생 유적지),2018.12.30)
최치원 선생은 합천 해인사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저 있으나, 홍산의 무량사 뒷편에 뭍혔다는 설과 홍주의 쌍계계곡 주변에 뭍혔다는 이설들 등이 존재하고 있다.
그중에 홍주의 쌍계계곡에 있던 최치원 선생의 묘를 문화재청에서 2015년도에 발굴조사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특이한 사료를 밝혀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쌍계금석문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80년대에 용못에서 가재를 잡던 초등학생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초등학생은 우연히 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발견하고 담임교사에게 보고했다. 그 후 홍성군 향토사학자 김갑현·전옥진 씨가 최치원이 남긴 유적으로 추정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홍성군에도 최치원의 후손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최종돈 씨와 여러 향토사학자들이 1999년부터 학술회의를 하며 고증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해 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 사학계에서는 최치원의 유적지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홍주일보 2018.4.20 참조)≫고 지역신문에 기고한 바로는 아직까지 사학계에서 쌍계계곡에 남아 있는 유적들이 지역민의 열의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가 보다.
보령지역의 최치원 유적을 답사하면서 홍성지역에 있는 선생의 유적을 답사하려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제대로 된 자료를 갖고 있지 않아 망설이고 있던 중에 백제부흥운동의 발자취를 쫒다보니 선생의 유적지가 이곳에 있음을 확인하여 주는 안내 표지판을 보자 바로 그길로 들어섯다.
장곡산성을 내려와 이정표가 방향을 잡아주는 약 4km 정도의 농로길을 달려 '문창후 최치원선생 유적지'에 들어섰다.
도로옆으로 조그만 공원이 조성되었는데 후손들과 지역주민이 세운 선생의 제단이 설치되어 매년 제향을 시행하고 있고, 계곡에서 수습 된 금석문들이 공원 터에 전시되어 있다.
주차장 아래로 계곡을 들어서는 목조계단이 가파르게 설치되어 있고, 계곡을 따라 돌다리처럼 개울을 따라 바위에 새겨진 석각을 관람하기 좋도록 조성해 놓았다. 주변의 지형으로 보아서 깊은 계곡이 있을 정도가 아닐 것 같은데 개울 폭은 넓지 않지만 제법 골짜기가 깊고 서측벽으로 암벽이 조성되어 옛 선인들이 석각을 하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풍류를 즐기기에 적당한 장소로 보였다. 비록 희미해진 석각의 글씨가 무슨 내용인지 알수 없지만 글씨체에서 힘이 솟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석재의 재질로 보아 퇴적암중 편마암계로 연약암반으로 추정되는데, 풍화가 진행되어 과연 천년 전에 석각된 금석문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낭혜화상비는 남포석(오석)으로 세워져 천년이란 세월을 너끈이 버티어 왔지만, 남포의 보리암 병풍바위에 새겨졌다는 최치원 선생의 금석문은 병풍바위가 단단한 화강암인데도 마모가 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불과 2백 여년 전에 새겨진 청라의 '도화동 문(桃花洞 門)'도 이곳의 바위재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의 금석문과 같은 마모를 하고 있어 좀 더 과학적 시기의 규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쌍계(雙溪)"와 "최고운서(崔孤雲書)"라고 석각 된 금석문이 과연 최치원 선생이 쓴 글인지, 우리나라 최고의 문인인 최치원 선생의 글을 숭앙하던 옛 지역 선비의 모사인지 좀 더 연구하고 자료를 찾아야 하는 일이 이 지역 향토사학자들이 하여야 할 일이라고 본다.
논란이 되고 있는 진위 여부는 제쳐 놓고라도, 쌍계계곡에 조성되어 있는 금석문은 우리의 조상들이 오래전 그땅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남겨놓은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불과 한 세대 앞을 살아온 부모들의 삶도 정확하게 모르는데, 백 년,천 년 전에 일어난 일들을 정확하게 규명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을터다.
지역신문에 실렸던 쌍계금석문 발견 당시의 이야기도 최치원선생 유적지의 스토리텔링 자료로서 충분하다고 본다.
2. 마애금석문
* 위치 ;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290-1
신라말기의 학자인 최치원 선생의 친필 금석문이 있는 유적지이다. 최치원 선생은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로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 포수현위(宣州 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乘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 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남 때에는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 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부성군(충남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판,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현장 안내판 참조)
장곡면 쌍계리 용연 마을은 해동성인으로 칭송되던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한동안 은거했던 곳이다.
옛날에는 마을 앞쪽으로 산자수명한 계곡이 장관을 이루었으며 뒤쪽으로는 석성과 함께 극락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가운대로는 동쪽과 서쪽의 두 물줄기가 한 쌍으로 흘러내리다가 합쳐지며 큰 못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계곡을 최치원 선생이 쌍계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최치원 선생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양하기 위해 쌍계의 서쪽 암벽에 13개의 마애금석문을 남겨 놓았는데 그 중에 "쌍계(雙溪)"와 "최고운서(崔孤雲書)"라고 새겨진 글씨는 이곳의 유래와 함께 마애금석문의 주인공이 최치원 선생임을 밝혀주고 있다.
이 마애금석문은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쌍계의 아름다웠던 옛 모습들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쌍계계곡의 유래 현장비문 발췌, 1995년 12월 홍성군수)
@ 지방도 96번 대현리 입구 표지판
@ 월계리 최고운 유적지 전경
@ 쌍계 계곡 내리막과 석벽
@ 바위에 새겨진 금석문
@ 바위에 새겨진 금석문
@ 바위에 새겨진 금석문
@ 바위에 새겨진 금석문
@ 유원지내로 옮겨진 금석문
@ 유원지내로 옮겨진 금석문
@ 유적지 안내판
@ 유적지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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