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188

제167편 ; 대천 산신당(1)

1. 들어가며 이제는 마을마다 지내던 당제나 산신제 같은 마을 공동체 행사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많은 요식과 격식이 생략되고 주민의 참여도도 떨어졌지만, 아직까지는 그 편린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대천초등학교 주변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생기고, 그들의 천왕을 숭배하는 신사를 산 줄기에 세우고 우리 국민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던 암울한 역사를 가진 곳이다. 오서산 줄기가 서해바다 쪽으로 흘러들어 봉황산이 되고, 봉황산 자락이 서남방향으로 펼처지며 대천 읍내를 품는 형국의 산세에 오래 전부터 지역민들이 모시던 산신당이 위치한다. 산신당이 세워진 것이 갑오년(1894) 부터라니 일제의 조선병합에 불안을 느낀 백성들이 민족정신 고취를 위한 ..

제166편 ; 오서산 도독의 성

1. 들어가며 오서산의 서측 사면 기슭에 산성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몇 번의 탐사 산행을 해보았지만 찾지를 못하였었다. 작년 초에도 성당골로 오서산에 오르면서 오서산 안내도에 표기된 '도독의 성' 주변 신암사 터 주위를 훓터보기도 하였는데 수목이 우거져 가늠하기 힘들기에 낙엽이 진 후에 다시 탐방하기로 하고 또 미루게 되었다. 지난 가을, 지인으로 부터 '도독의 성'이 던목고개에서 신암터를 경유하여 청라 명대계곡 월정사로 연결된 임도를 따라 걷다보면 임도 아래쪽 밤나무 단지 끄트머리의 숲속을 유심히 찾아보면 있을거라는 말을 들었었다. 설 명절 차례를 지낸 다음날, 성연소류지에 차를 세우고 문수골로 들어가 임도에 도착하여 폭 넓게 넙티재를 향해 걸으면서 밤나무 단지를 찾기로 했다...

제165편 ; 항일 애국열사 류준근의 묘역

1. 들어가며 열사의 호를 보면 우록(友鹿)으로 불리었다. '사슴의 벗'이라고나 할까? 그가 태어난 곳이 지금의 대해로 구간의 대천역에서 조금 벗어 들어간 녹문(鹿門)이라는 마을이다. 녹문은 나즈막한 환산(둘릴산)이 마을를 감싸안고, 앞에는 옥마산에서 발원한 궁촌천이 휘감아 돌아가며 넓은 벌판을 적셔주기에 옛부터 '사슴의 둥지를 품은 듯한 마을'이라고 불렸다. 마을 입구에는 청백리 류경창(淸白吏 柳慶昌)의 묘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서 있을 정도로 많은 인재들이 태어난 고을이다. 그러함에 열사도 자신의 호에 사슴을 의미하는 '록(鹿)'을 품었나보다. 대천에서 21번 국도를 따라 광천쪽으로 향하다 보면 청소사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면 나지막한 구릉으로 형성된 신송리에 들어서게 된다. 유난히 ..

제164편 ; 장현리 당집

1, 들어가며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던 외진 모퉁이 길에는 어김없이 나직한 돌담과 낮은 초가지붕의 음침하면서도 무섭기도 한 상엿집이 있어 발길을 빨리했던 추억들이 있다. 마을 어귀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새끼줄에 울긋불긋 천 조각을 끼워 둥지를 감아 돌려 신(神)이 사는 당목(堂木)임을 말해 주었다. 큰 마을에는 따로 앞산에 당집을 마련하고 산신이나 신령들을 모시고 제를 지내게 될 때면 천둥벌거숭이처럼 뛰대던 어릴적 모습이 그려진다. 당제는 농경사회에서 두레와 같은 개념으로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장치였다고 본다. 인류가 농사를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어떤 형식으로든 하늘에 농사짓기 좋은 기후를 기원하고, 자식들의 번성과 성공을 기원하며 기도할 수 있는 대상이 당집이었을 것이다. 수천..

제163편 ; 백야 김좌진 장군 추모제

1, 들어가며 음력 시월이 되면 풍성한 가을을 맞이해 각 가문마다 조상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흩어져 살던 후손들이 선산에 모여 시제를 지내는 아름다운 풍속을 이어가고 있다. 보령 땅 청소면에 위치한 백야 김좌진장군의 묘소에서도 지자체의 주최로 단체장들과 후손들,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모여 추모제를 진행하고 있는데, 김좌진 장군이 만주에서 1920년 10월 20일부터 10월 26일까지 일본군을 포위하고 혁혁하게 물리쳐 승리를 이끌었던 청산리대첩이 벌어진 시기에 맞춰 그 얼을 되새기며 매년 추모제를 진행하고 있다. 김좌진 장군은 홍성의 갈산면 출신으로 멀리 만주땅에서 아쉽게도 암살되어 산화 되었지만, 그의 부인이 힘들게 유골을 수습하여 홍성으로 옮겨 안치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후손들에 의해 ..

제162편 ; 독립지사 동양자 김광제(東養子 金光濟)

1, 들어가며 동대 사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가로변 공원에 서 있는 황동색 동상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에 들어온다. 일제 강점기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서 진행 하였고, 대구 등의 경상도 지역에서 민족계몽운동을 추진하며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전념을 다하여 일생을 바친 우리고장 웅천 평리 출신의 독립지사 동양자(東洋子) 김광제(金光濟) 선생을 기념하는 동상이다. 우리 지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보령에서의 활동이 미약해서인지 지역민들은 김광제 선생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지, 시민들은 무심하게 동상 앞을 스쳐 지나간다. 김광제는 부친 김상하(金商夏), 모친 풍천임씨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명은 홍제(弘濟), 호는 동양자(東洋子), 시호는 석람(石藍), 자는 덕재(德在)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17대조인..

제161편 ; '보령의 섬' 기획 특별전

1, 들어가며 보령박물관에서 기획특별전으로 2022년 8월 20일부터 2023년 2월 28일까지 '보령의 섬'이 기획전시실 1관에서 전시된다. 보령에는 유인도 15개소, 무인도 75개소, 미등록 무인도가 58개소로 도합 145개소의 섬이 존재한다. 현재 보령의 섬에는 유인도 15곳에는 1,500여 가구의 3,000여명 주민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다. 대표적 도서로는 근래 연육교와 터널로 연결된 원산도, 서해의 비경 외연도, 호도, 녹도, 화살촉 같은 지형의 삽시도, 고대도, 장고도, 효자도, 불모도, 월도, 육도 등이 있다. 보령지역에 사람이 살았었다는 증거로 이지역에서 출토된 구석기 유물들로 추정하여 대략 5만년 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서해바다가 빙하기에는 중국대륙과 연결된 평편한 내륙이었고, 차츰 간..

제160편 ; 쇳개와 해소포(蟹所浦)

1, 들어가며 대천 시가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은 성태산을 발원지로 한 대천천과 오서산을 발원치로 하는 옥계천이 합류하여 흐르는 냇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대천천의 이름이 유수지역의 지명을 따서 청라수라 불려졌음이 천휴당 이몽규의 행장비에 기록되어 있음으로 알 수 있다. 60년 대에만 해도 대천역 서쪽은 넓은 농경지가 있었으며 논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대천천을 따라 뚝방이 이어져 있었고, 그 아래로 갈대숲 사이로 바닷물이 들락날락거리고 모래를 퍼 나르던 바지선(드럼통으로 엮어서 화물을 실을 수 있도록 만든 배)들이 오가던 모습이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일제강점기가 되어 일본인들은 수심이 얕아 그때까지 이용되던 해소포구를 버리고 현재의 대천어항으로 위치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조선배가 바닥이 평편한..

제159편 ; 마한의 만로국(萬盧國)

1. 들어가며 보령시청 홈페이지에서 보령의 연혁을 살펴보면 삼한시대 마한 만로국(萬盧國, 삼한의 78개 부족국가 형성기, 삼국지한전 참고)으로 부터 시작하고 있다. 보령의 북부지역은 백제 때 신촌현(新村縣), 신라 때에 신읍현(新邑縣), 고려시대에 보령현(保寧縣)으로 변환이 있었고, 남부지역은 백제 때 사포현(寺浦縣), 신라 때에 소포현(蘇浦縣), 고려시대에는 가림현(架林縣)으로 지명이 바뀌다가 두 현이 일제강점기 통합이 되어 지금의 보령시로 변경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한 만로국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궁금증으로 남아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몰랐던 마한」이라는 책을 접하면서 미약하나마 갈증을 조금 풀게 되었다. 저자는 마한(馬韓)에 대한 기록은 3세기 후엽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

제158편 ; 용두마을 용굴과 참샘터

1. 들어가며 독살을 보기 위해 용두마을 해안도로에 들어서자 도로 옆 해안가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살펴보니 참샘터의 안내판이다. 바닷가에는 흔히 민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기 마련인데, 갯일을 하는 어민에게는 갈증을 씻어내는 달콤함을 주기에 중요하게 생각을 하였다. 3년 전 가을, 삽시도를 답사할 적에 바위 틈으로 솟아 나오는 샘으로 밀물 때는 바닷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나타나는 샘으로 물망터라는 이름을 가진 샘을 찾아 헤매었던 기억이 났다. 이처럼 바닷가에서 일하는 어민들에게는 바닷가에 솟아나는 민물 샘은 힘든일을 잠시 잊고 다시 고된일에 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편리하게 생수를 보관하고 지참을 할 수 있으니 샘의 중요도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사용하지 않는 샘터에 사람이 찾을리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