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190

제149편 ; 예진사(蘂珍祠)와 백관형 선생 묘역

1. 들어가며 한 해 전에 화락산에 올라 서쪽을 조망하면서 웅천산업단지와 그 옆으로 넓게 새로 조성되는 산업단지 터를 보았었다. 조성된 부지를 핸드폰으로 지도 검색해 보니 '차다맥이산'으로 나와 참 희한한 산이름도 다 있구나하고 어찌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하였다. 웅천읍의 지명유래에도 검색이 되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백관형 선생의 묘역을 답사 하면서 다시 검색 해보니 그 지역에 살았던 네티즌의 글을 보고서야 연유를 알게 되었다. '차다맥이산'은 기존에 차돌이 많이 나온다고 불려왔던 '차돌백이산'의 지도작성 중의 오류라고 한다. 나즈막하던 동네 산이름이 전혀 의미도 없는 지명으로 탈바꿈 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역사에서 이런 지명의 탈바꿈 현상은 수시로 나타난다. 하기사 이젠 '차돌백이산'도..

제148편 ; 평리 평산신씨 정려각

1. 들어가며 웅천읍 평리(동막골)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선생의 묘택을 답사하면서 우연하게도 전면과 좌우측이 한칸으로 되어있는 맞배지붕의 정려각을 만났다. 주변으로 이 각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설치되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백씨 가문으로 시집 온 평산신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정려각이었다. 옥산사 옆 도로변에 설치한 이 정려각은 개울가 쪽으로 낮은부분을 견치블록으로 쌓고 성토를 하여 부지를 만들고, 단청과 지붕을 보니 세운지 얼마되지 않은 듯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신씨 열녀문을 검색해 보니 이곳에서 약 3km 떨어진 주산면 화평리 약현마을 구릉에 세워진 열녀비를 문중의 사패지인 이곳으로 옮겨온 것 같다. 평산신씨(平山申氏)는 남포인 백락완(藍浦人 白樂完)의 처로 남편이 죽자 3년 상을 마치..

제147편 ; 풍천 임씨 임향의 묘

1. 들어가며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선생의 묘를 답사하려 동막골 골짜기를 헤매다가 풍천임씨(豐川任氏)의 묘택을 만나게 되었다. 동막골 골짜기 끄트머리집(평리 산 36-2) 앞에서 차를 세우고 그집 앞마당에 서있는 추원보본(追遠報本)비를 만나게 되는데, 그비를 중심으로 좌측으로 올라가면 백이정 선생의 묘택으로 가는 길이되고, 우측으로 골짜기를 타다가 우측 능선을 오르면 임향의 묘택이 나온다. 풍천은 북한에 소재한 개성 부근을 말하는 옛지명이며, 임향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의병활동을 한 사명대사 기적비가 보령도서관 내에 세워져 세인의 추앙을 받는 보령지역의 명가문으로 세가를 이루어가고 있는 집안이다. 향토학자들과 풍천임씨 가문 간에 벌여졌던, 사명대사 보령관련설과 계보의 연관관계 사실여부에..

제146편 ; 옥산사(玉山祠)와 백이정 선생 묘

1. 들어가며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선생은 본관을 남포(藍浦)로 하는 보령 출신의 성리학자이다. 고려말 충선왕을 따라 원경에 10년을 머물면서 성리학을 배우고 성리학에 관한 책과 주자의 「가례(家禮)」를 구해가지고 국내로 돌아와 많은 제자들에게 성리학을 전파하였다. 제자들로 이제현, 이곡, 박충좌, 백문보 등 많은 문인들이 그의 가르침에 따랐다. 특히 한산출신 이곡(李穀; 1298~1351), 이색(李穡; 1328~1396) 부자와, 남포출신 이제현(李齊賢; 1287~1367)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원래 공자가 설파한 유학은 한반도에 자리잡은 삼국시대부터 정치,권력에 영향을 주었는데, 공자의 사상을 정립한 주자의 학설(성리학)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으로 1289년 안향(安珦; 1243~1306)이..

제145편 ; 보령 현충탑 (충혼각)

1. 들어가며 대천읍내에서 웅천으로 가는 구길로 접어들어 성주로 빠지는 분기점 전, 그 우측으로 나지막한 동산이 위치 하는데, 그곳에 보령 현충탑이 세워져 있다. 요즘 한참동안 이지역에 고층 아파트가 건립 중이어서 현충탑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여 다녀왔다. 아파트 단지는 골조 공사를 마치고 한창 마감공사가 진행되고 있기에, 예전의 현충탑 스카이 라인이 왜소화 되어 막혀있어 답답함을 주지만 서쪽으로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 그래도 좀 다행스럽다. 하지만 언젠가는 도심화 되어 결국 아파트 단지내의 소공원 처럼 변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군사독재 정부가 들어선 후에 남북은 이념적 대립을 극대화 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충(忠)과 효(孝)를 결합한 '충효사상'을 국민들..

제144편 ; 성주사지 (4, 성주사지 석등과 석불입상)

1.들어가며 가람에서 석등은 중생에게 불을 밝혀 극락으로 인도하는 등불로 대체로 가람 입구에 세워진다. 이 석등은 성주사 창건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붕돌(옥개석)에 비해 등불을 키는 화사석(火舍石)과 받침기둥(간석)이 가늘게 만들어졌으며, 팔각형 지붕돌 위의 상륜부가 유실되었다. 높이는 220cm이며,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지대석은 주변의 판석을 모아 대용하였고, 그 위에 지대하석과 연화하대석을 하나의 돌로 만들고 각 면에 2개씩의 안상(眼象)과 복련(覆蓮)을 새겼다. 3단의 굄 위에 서 있는 단면 팔각형의 간석(竿石; 기둥)에는 아무 장식이 없다. 1971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성주사지 강당터 동쪽에 서 있는 석불입상은 큰 가람에 어울리지 않을 듯한 토속적이다. 마을 어귀에..

제143편 ; 성주사지 (3,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1. 들어가며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는 보령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이다. 성주산문을 일으킨 무염대사(無染大師)를 기리기 위해 왕명을 받아 최치원이 글을 짓고 최인연(고려때 최언위)이 글을 썼다. 큰 스님이 타계하면 공적을 적은 탑비와 사리를 안치하는 부도를 함께 조성하는데, 성주사지에는 탑비만 전해져 온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현재의 물탕골 부근에 부둣골이라는 지명이 내려오는데 그곳에 묻혀있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대사의 유골을 모신 부도를 백월보광탑(白月葆光塔)이라 하는데, 아쉽게도 찾지 못한 부도가 발견되어 탑비와 함께 한다면, 더할나위 없이 문화재의 가치는 상승하리라 본다. 비(碑)의 형태는 상부의 하중을 받쳐주는 거북모양의 귀부..

제142편 ; 성주사지 (2, 보령 성주사지 삼층 석탑)

1. 들어가며 신라의 석탑이 화려함과 웅장함의 극치를 보여준다면, 백제의 석탑은 단아하면서 우아함을 보여준다. 성주사지 금당지 후편에 위치한 3기의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면서도 백제탑의 형식을 배제하지 않은 지역적 특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다. 신라시대 보편적인 가람 형식을 벗어나 금당 후편에 3기의 석탑을 다시 세운 것은 극히 파격적인 행위라 볼 수 있다. 왜 그들은 보편성을 배제하고 독특한 구도로 이 탑들을 세웠을까? 성주사지 천년 역사관의 자료에 의하면 중건기 성주사에서 「 창건기 성주사는 13세기 중엽 화재로 인하여 절 내부의 상당수 건물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실된 성주사는 '대덕5년(1301)'이 새겨진 청동 광명대나 청자 편 등의 유물을 통해 13세기 후반 경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제141편 ; 성주사지 (1, 창건기의 성주사지)

1.들어가며 성주사지 천년역사관을 관람하고 오랫만에 성주사지를 살펴 보았다. 참 많은 발길을 하였지만, 차분하고도 세세하게 훓터본 것이 언제인지 집에 돌아와 블로그를 살펴보니 대충 관람한 답사기 뿐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을 모시던 금당을 중심으로 한 일탑일금당의 배치로 본 창건기의 성주사지 유물을 한 편으로 하고, 금당 후편 후기에 세워진 3기의 탑으로 한 편으로 하고, 성주사 대낭혜화상비를 또 한 편으로, 또 오층석탑 앞에 세워진 석등과 강당 오른쪽에 세워진 석불입상을 한 편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사적지의 답사에서 중요한 것은 사전에 그 지식을 찾아 알아보고, 현장에서 역사해설가의 설명을 꼭 들어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 지역의 역사는 그 지역 역사해설가 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순서를 ..

제140편 ; 성주사지 천년 역사관

1. 들어가며 몇 해 동안 성주사지 앞길을 지나치면서, 한동안 역사관을 건립하는 공사현장을 바라보며 언제, 어떻게 개관을 할 것인가 궁금하였는데, 올 봄 드디어 개관을 한다고 하여, 비 그친 토요일 오후에 시간을 내 찾아 보았다. 천년 역사관은 2000년도 부터 사업비 약 70억원을 들여 지상 1층에 연면적 917m2(약 278평) 규모로 홍보실, 영상 체험실, 어린이 전용 체험관, 휴게실 등으로 구성하여 금년 3월 21일 기관장들과 함께 개관식을 하였다고 한다. 홍보실을 들어서니 정면에 성주사를 축소 복원한 미니어처가 전시되어 있고, 벽면에는 성주사의 역사와 가람 배치, 또한 발굴을 통한 유물들을, 사진과 화면을 통해 학습할 수 있도록 전시장이 꾸며져 있다. 올해 유월까지는 개관을 기념하여 무료로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