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선생은 본관을 남포(藍浦)로 하는 보령 출신의 성리학자이다.
고려말 충선왕을 따라 원경에 10년을 머물면서 성리학을 배우고 성리학에 관한 책과 주자의 「가례(家禮)」를 구해가지고 국내로 돌아와 많은 제자들에게 성리학을 전파하였다. 제자들로 이제현, 이곡, 박충좌, 백문보 등 많은 문인들이 그의 가르침에 따랐다. 특히 한산출신 이곡(李穀; 1298~1351), 이색(李穡; 1328~1396) 부자와, 남포출신 이제현(李齊賢; 1287~1367)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원래 공자가 설파한 유학은 한반도에 자리잡은 삼국시대부터 정치,권력에 영향을 주었는데, 공자의 사상을 정립한 주자의 학설(성리학)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으로 1289년 안향(安珦; 1243~1306)이 원나라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저온 것을 시초로 알려져 있다. 물론 다른 이견으로 남송이 망할 무렵 송나라 절강성의 유학자 정신보(鄭臣保; 서산정씨의 원조, ?~1271)가 고려국 간월도에 망명하여 성리학을 가르쳤다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성리학의 발전은 백이정 선생에 의해 고려로 들어오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조선건국과 한국유학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보령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선생의 묘소가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경상도 남해군에 '남해 전 백이정 묘(南海 傳 白頤正 墓)'가 존재하고, 경상남도 기념물 제 155호로 지정까지 되어있다. 그곳에서도 옛부터 '백정승의 묘'라고 전해오기는 했으나 확실한 고증은 없는가 보다. 그렇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만으로도 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면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당연히 남포를 세거지로 한 남포백씨의 뿌리가 이곳으로, 후손들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을텐데, 보령에 있는 이재 선생의 묘는 어째서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궁금하였다.
보령댐에서 웅천읍내 쪽으로 웅천천이 휘감아 돌아나가는 곳에 동막골이 있다. 양각산(해발 467m) 봉우리에서 맥이 뻗어 내리는데, 동쪽편 한줄기는 정상에서 보령댐 밑쪽으로 흘러내리고, 서쪽편 한줄기는 정상에서 동막산을 거쳐 웅천읍내쪽 벌판 남서쪽 방향으로 흘러 내려 그 사이 동막골을 아늑한 골짜기로 형성한다 . 도로 입구에는 백씨 가문에서 세운 요즘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는 '백씨사현(白氏四賢)' 기적비가 오랜세월 풍우에 씻겨내린 듯 서 있다.
마을길로 들어서서 조금 더 가면 신도비가 나오고, 우측에 홍살문과 뒤로 외삼문(大承門)이 보이고, 내부의 제당에는 현판이 보이질 않는다. 양각산 아래 터를 잡아 구름과 산이 조화를 이룬다.
마을에 사는 후손들의 이야기로는 평상시에는 출입문을 폐쇄하고 매년 10월 넷째주 일요일에 시제를 지낸다고 한다.
옥산사(玉山祠) 옆으로 조그만 누각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살펴보니 열녀문이었다. 백씨 문중으로 시집 온 평산신씨를 위한 열녀문이었다. 그 옆으로 난 마을도로를 타고 계곡을 올라가면 끄트머리에 주택이 한채 있는데, 마당 앞으로 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전면에 '추원보본(追遠報本;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며 은혜를 갚음)'이라 쓰여 있고, 측면과 후면에 작은 글씨의 한문으로 새겨 있는데, 한문이 짧은 내겐 이해하기 쉽지않다. 각 지역에 사는 후손들이 묘택을 조성하면서 후원한 자의 명단이 쓰여 있는데, 남포 백씨의 것인지, 풍천 임씨의 것인지 확인을 못하였다.
주택의 대문에 들어서면 좌측으로 돌담을 끼고 임도를 따라 계곡으로 한참을 가다보면, 계곡에서 능선으로 가는 경사로가 있다. 선생의 묘역을 조성하느라 소형 굴착장비가 도로를 내 오르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묘소는 후손들이 잘 보존하여 훼손은 없었다. 잠시 참배를 하고 둘러보니 풍수학에 무지한 사람이 보아도 양각산을 주봉으로 하고 좌청룡 우백호의 맥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일설에 의하면 백이정 선생의 묘지가 오랫동안 후손들이 이 지역을 떠나가버려 실전(失傳) 되었다고 한다. 족보를 근거로하여 다시 찾으려고 유택 비슷한 곳을 발굴하였는데, 그곳에서 풍천임씨의 지석이 나왔다고 한다.
풍천 임씨의 중시조인 임향(任珦)의 묘소를 찾아가보니 같은 양각산 아래 한골짜기 사이로 능선의 방향도 비슷하여 족보에 적힌 묘의 좌향으로는 오해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었다.
남포 백씨나 풍천 임씨의 가문이 보령에서 명가임에 틀림 없기에, 이승을 떠난 후에도 서로 이웃하고, 후손들 중 항일운동으로 이름을 떨친 선구자가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선생의 사상은 고려말은 물론 조선왕조의 사회, 정치, 사상 등에 전반적인 영향을 끼쳤다.
2. 옥산사(玉山祠) 백이정 선생 묘소
@ 옥산사 위치 ; 보령시 웅천읍 평리 624 (동막골)
@ 백이정 묘소 ; 보령시 웅천읍 평리 산 36-2
@ 백광원 공. 백이정 선생 묘소(白光元 公.白頤正 先生 墓所)
이곳에서 약 500미터 올라가면 신라 말 평장사 백광원공(平章事 白光元 公)과 고려 말 성리학의 원조이며 동방부자(東方夫子)라 추앙하는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1247~1323) 선생의 묘소가 있다.
백광원공은 신라 현안왕 때의 간관 휘증학 공의 손자로서 신라 경문왕 때 광록대부 문하시중 정당문학 평장사에 이르렀고,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옛날 중국의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짝할만 하고 소하(蕭何)와 조참(曺參)의 위에 있다고 전해진다.
백이정 선생(白頤正 先生) 선생의 호는 이재(彛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며 본관은 남포로 시조 간관공의 후손이며 국학대사성 시문간공 휘문절의 아들이다. 충렬왕 10년(1284)에 문과에 등과하고 누관하여 충숙왕 때 첨의평리(僉議平理),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백이정 선생은 천품이 순후하고 공보의 기량이 있어 충선왕을 보도(補導)하였다. 이 시절 충선왕이 개혁정치를 강행하자 반대파의모함으로 즉위 7개월 만에 왕이 원의 소환으로 원경(元京)에 갈 때 선생은 왕을 따라 10여 년간을 원경에 체류하였다. 당시 정주학(程朱學)이 처음 중국에서 행하였으나 우리나라에는 미치지 않았는데 선생이 재원 중 10여 년간 연구통달(硏究通達)하여 돌아와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에게 먼저 사수(師授) 하고, 이어 이곡(李穀), 이인목, 백문모 등 많은 학자에게 훈회강수(訓誨講授)하니, 이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근원이 된 것이다.
이곳 구남포는 백씨의 연원지로서 백씨사현과 그 후손이 거금 1,200년간 세거세장(世居世葬)한 곳으로 선생께서 만년에 귀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치고 성인서(聖人書)를 분향정독(焚香靜讀) 하시다 충숙왕 10년(1323) 향년 77세에 서거하여, 이곳 양각산 서록 길지에 영면하셨다. 묘소의 국내(局內)는 조선왕조 고종 황제께서 재위 2년 5월에 명신,명현(名臣, 名賢)의 묘소를 영구히 존엄수호(尊嚴守護)하라 하여 묘림(墓林) 41만 여 평을 하사한 사패지지(賜牌之地)이다. (현장 안내판 발췌)
@ 웅천읍 동막골 입구 백씨 옥산사 입구 안내석
@ 동막골 마을 입구 백씨사현(白氏四賢) 기적비
@ 옥산사 홍살문과 외삼문(大承門) 전경
@ 옥산사 내부 재실
@ 옥산사 입구 신도비
@ 동막골 맨 윗집 뒤로 백이정 선생 묘소로 가는 임도가 있다. 길가에 추원보본(追遠報本;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며 은혜를 갚음) 비가 세워져 있다.
@ 신라말 평장사 백광원의 묘
@ 이재 백이정 선생의 묘
@ 백이정 선생의 묘의 후편에서 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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