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선생의 묘를 답사하려 동막골 골짜기를 헤매다가 풍천임씨(豐川任氏)의 묘택을 만나게 되었다. 동막골 골짜기 끄트머리집(평리 산 36-2) 앞에서 차를 세우고 그집 앞마당에 서있는 추원보본(追遠報本)비를 만나게 되는데, 그비를 중심으로 좌측으로 올라가면 백이정 선생의 묘택으로 가는 길이되고, 우측으로 골짜기를 타다가 우측 능선을 오르면 임향의 묘택이 나온다.
풍천은 북한에 소재한 개성 부근을 말하는 옛지명이며, 임향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의병활동을 한 사명대사 기적비가 보령도서관 내에 세워져 세인의 추앙을 받는 보령지역의 명가문으로 세가를 이루어가고 있는 집안이다.
향토학자들과 풍천임씨 가문 간에 벌여졌던, 사명대사 보령관련설과 계보의 연관관계 사실여부에 대한 논란은 여기서 논할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고려말 경에 보령으로 내려와 은거하면서 후손들을 퍼지게 한 뿌리의 근원이라 하겠다.
풍천임씨 향(高麗政丞 豐川任氏 珦)의 묘표를 살펴보면, 1839년(헌종 5년)에 이 고을의 남포백씨들이 백이정 선생의 묘소를 찾으려고 묵은 무덤을 파보다가 임향의 지석을 발견하여 풍천임씨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대부분 씨족의 시조는 고려 말 보학이 발달하면서, 족보의 개념이 조선시대에 와서 형성 되었듯이, 조선 초기 이전의 내력은 정확하게 표기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선대의 시조 묘는 대부분 실존된 경우가 많은데, 직계 후손들이 손이 끊기거나, 멸문지화를 당하거나 혹은 삶은 근거지를 옮기는 경우에 시조묘를 관리하지 못하여 망실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어느 지역에는 향토지주 양반가가 망하게 되면 그 양반 밑에서 소작을 하던 양민들이 선산에 있는 묘와 비석들을 일부러 땅을 파고 뭍었다고 한다. 추후에 그 마을 지주들의 후손들이 찾아와 땅에 대한 주장을 제기하는 근거들을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 그런 행위가 자행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것은 결국 후손들이 조상들의 터전을 지키지 못한 탓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우연한 기회로 풍천임씨들은 남포백씨들이 조상묘를 찾으려다가, 실존된 조상묘를 찾아 향사를 이어갈 수 있으니 다행이랄 수 있겠다. 보령의 산들을 산행하다 보면, 좋은자리에 시신을 지게에 지고 올라가 썼을 것으로 생각되는 허물어진 묘를 많이 볼 수 있다. 한두 세대만 찾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묘자리라 할지라도 허물어져 빗줄기에 쓸려 흔적없이 사라진다.
두 집안은 어렵게 찾은 조상의 묘소를 잘 보전하여 조상들의 은혜에 충만하길 기원해본다.
역시 추원보본(追遠報本)이라.
2. 고려정승 풍천임씨 향(高麗政丞 豐川任氏 珦)의 묘표
@ 위치 ; 보령시 웅천읍 평리 산 36-3
공(公)의 시조(始祖)는 온(溫)이시고 본관(本貫)은 풍천(豐川)이다. 公의 휘(諱)는 향(珦)이시며 호(號)는 남은(藍隱)이시다. 풍천임씨(豐川任氏)의 첫 공식기록(公式記錄)은 6세 어사대부(御史大夫) 주(澍)께서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경상도 안찰사(按察使)를 지내신 것이 경상도 선생안에 실려있다. 어사공 주(御史公 澍)의 맏아들 자송(子松)은 반신(反臣) 조*(曺*)을 토벌한 공으로 서하부원군(西河府院君)에 봉(封)되시였고 벼슬이 시중에 이르셨다. 둘째아들 자순(子順)은 통헌대부(通憲大夫) 민부전서(民部典書)이시고 이 전서공(典書公)의 맏아들이 공이시다.
공의 출생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로 추정된다. 공은 일찍이 벼슬에 나가 공민왕(恭愍王) 때에는 정승(政丞)에 오르셨다.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재상으로 중용한 인사가 고금대취(古今大恥)라는 직간상소(直諫上疏)를 여러번 올린 일로왕의 노여움을 사서 홍주 고구도(高丘島)로 유배 되셨고, 후에 남포 죽도(竹島)로 이배(移配) 되셨다.
이성계의 건국(1392)으로 유배생활에서 사면되셨고, 새 조정으로 부터 출사의 권유를 받았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로 사양하시고 남포현(藍浦縣) 오상동(五相洞)에 은거(隱居) 하시며 시서(詩書)를 벗삼아 일생을 마치셨다.
하나 서거연대(逝去年代)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공의 맏아들은 진사 안길(進士 安吉)이시고, 둘째 아들은 장락원 정(掌樂院 正)의 벼슬을 하셨고, 통례원 좌통례(通禮院 左通禮)에 증직(贈職)되신 효곤(孝崐)이시다. 임잔란(1592~1598)때 호국승장(護國僧將) 사명대사(四溟大師)는 공의 현손(玄孫)이요 통례공 효곤의 증손인 응규(應奎)이시다. 공의 묘소는 남포현 양각산 염주봉(念主峰)의 묘좌원(卯座原)이다.
이 고을은 여러 차례 왜구의 침범과 임진란의 피해가 극심하여 한동안 후손들이 성묘조차 끊기며서 공의 묘소는 실전(失傳) 되었었다.
헌종(憲宗) 5년(1839)에 이 고을 백씨(남포백씨)들이 그들의 시조 상당군 백이정(上黨君 白頤正)의 묘소를 찾기 위해 묵은 무덤 하나를 파다가 「정승 풍천임공 향(政丞 豐川任 珦」이라고 쓰인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공의 묘소를 다시 찾게 되었다.
공의 후손들은 그때부터 묘소에 사초(莎草)하고 향사(享祀)를 받들었으며 김지수(金志洙)의 지은 글로 묘비를 세웠다. 공의 신도비(神道碑)는 방손(傍孫)인 전제 헌회(全齊 憲晦)의 지은 글(1864)로 묘소의 출입로인 산기슭에 세워졌다.(1907)
이에 늦게나마 공의 묘역을 다시 새롭게 단정하며 공에 관한 기록은 정조 정사보간(丁巳譜刊)과 신도비명(神道碑銘) 및 기타의 문첩(文牒)들을 근거로하여 비에 새겨두는 바이다. 2010년.(현장 묘표 발췌)
@ 길가에 추원보본(追遠報本) 비가 세워져 있다.
@ 임향의 묘택
@ 고려 정승 임공의 묘비
@ 좌측의 망두석, 문인상, 석등
@ 우측의 망두석과 문인상
@ 고려정승 풍천임씨 향의 묘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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