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49편 ; 예진사(蘂珍祠)와 백관형 선생 묘역

푸른나귀 2022. 4. 4. 20:01

1. 들어가며

 

  한 해 전에 화락산에 올라 서쪽을 조망하면서 웅천산업단지와 그 옆으로 넓게 새로 조성되는 산업단지 터를 보았었다. 조성된 부지를 핸드폰으로 지도 검색해 보니 '차다맥이산'으로 나와 참 희한한 산이름도 다 있구나하고 어찌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하였다. 웅천읍의 지명유래에도 검색이 되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백관형 선생의 묘역을 답사 하면서 다시 검색 해보니 그 지역에 살았던 네티즌의 글을 보고서야 연유를 알게 되었다.

 '차다맥이산'은 기존에 차돌이 많이 나온다고 불려왔던 '차돌백이산'의 지도작성 중의 오류라고 한다. 나즈막하던 동네 산이름이 전혀 의미도 없는 지명으로 탈바꿈 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역사에서 이런 지명의 탈바꿈 현상은 수시로 나타난다. 하기사 이젠 '차돌백이산'도 불도저로 깍아내려 평평한 공장 부지가 되어버려, 그 이름 또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으니 산이름을 제대로 찾는다는 것도 무의미할 것같다.

 

 웅천돌문화공원으로 옮겨진 구룡리 돌방무덤인 '횡혈식 석실고분'도 이 지역에서 발굴된 것을 옮긴 것이라 하니 백제시대에도 유품으로 보아 막대한 권력을 가진 토호세력이 살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만큼 오래전 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선대들의 흔적과 가까운 시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948년 부터 보령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을 전개한 추강 백낙관, 지산 김복한, 우록 유중근, 만취 황재현, 옥재 백관형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제를 지내면서 '보령 5열사'로 추앙해 왔다.

 '보령 5열사'의 지정에 대하여 일부의 이견으로 지산의 출생지가 홍주라는 것과 일부 세가의 편향적 배분이라 불합리하다는 의견이 제시 되기도 하였다.  상기의 인물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을 하신 모든 분들이 나라를 위하여 희생을 감내하였다면 행적을 찾아 고증을 하고 밝혀내는 일과 추앙을 하는 일에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옥재 백관형 선생의 묘역을 찾아 가는 길에 남포백씨 사직공파 사당을 들렀다. 

 외삼문 앞 좌우로 종중에서 설치한 기적비가 세워져 있고, 외삼문에는 옥산사와 마찬가지로 대승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내부 재실은 옥산사와 다르게  예진사(蘂珍祠)라는 현액이 걸려있으며, 콘크리트 구조로 외양이 일반 재실과 다르게 현대적인 느낌이 다가온다. 아마 재실을 설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나 보다. 

 

  

2. 예진사(蘂珍祠)와 백관형 선생 묘역

 

    @ 예진사 위치 ; 웅천읍 구룡리 222-13

    @ 백관형 선생 묘역 ; 웅천읍 구룡리 222-12

 

   @ 백관형(白觀亨, 1861~1929)

      호는 옥재(玉齋)이고 자는 경국(敬國)이며, 본관은 남포(藍浦)이다. 보령 남포면 양기리에서 백사량(白師亮)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수재로 유명하였으며, 성장하여서는 의암 유인석, 면암 최익현, 삼희당 윤석봉에게서 수학을 하였다. 1906년 민종식의 홍주의병진에 참모롤 가담하였고, 함일합방 후인 1916년에는 충북 괴산군의 만동묘 행사에 참여했는데, 백관형 선생은 유림들에게 한일투쟁을 역설하다가 괴산 경찰서에 체포되어 투옥 중 5일간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 후 보령경찰서에 이송되어 실신의 악형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않았다. 

 고종의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유준근 그리고 제자 김지정 등과 함께 상경하여 기회를 엿보다가 "조선독립은 우리들 이천만의 요구이다. 우리들은 손병희의 후계자로서 조선독립을 요구한다"는 취지를 기술한 애원서(哀願書)라고 제목을 붙인 선언서를 작성하고,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서명하여 총독에게 발송하는 한편 운집한 대중들 앞에서 낭독하다가 왜경과 충돌하고 체포되었다. 일명 「12인등의장서」사건이었다.

 우리나라 전국 유림들이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 여망을 전하는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를 보냈는데, 전국 유림대표 137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이어 서대문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8일간 단식을 하니 왜경이 차고 있던 긴 칼로 경제로 입을 열게 하는 과정에서 양 볼에 선혈이 낭자했다. 옥고를 치른 후에 고향에 돌아와서도 일제가 시행하는 여러 시책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저항 하였다. 삼희당 윤석봉이 웅천 대천리에 집성당을 창건함에 지역의 다른 유림들과 성력을 다하였다. 웅천 수부리에서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묘소는 처음에는 대천 명천동에 있었으나, 최근 웅천읍 구룡리 예전산으로 이장 하였으며, 그의 제자 박성철이 지은 묘비가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추서 하였다. 보령 5열사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된다.(보령문화원 강의자료, 황의천)

 

 

   @ 남포백씨 사직공파 종중 예진사 입구

   @ 예진사 외삼문의 현판도 대승문이다.

   @ 사당 안채 예진사

   @ 예진사의 측면 전경 

   @ 독립유공자 백관형 선생 묘역 조성 기념비

   @ 옥재 백관형 선생 묘역

   @ 옥재 백관형 선생 기적비